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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團法人

西厓先生記念事業會

서애선생 세계, 주요 행력

서애 선생 세계1)

류씨는 대대로 안동부 풍산현에서 살아왔다. ‘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것을 살펴보면, 류씨는 풍산에 사는 토성(土姓)이라 하였으나,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류씨는 오직 문화(文化)에 호적된 것이 가장 오래되고 이름이 드러났는데 차달(車達) 공의 후예라 하였고, 자손들이 비록 다른 것에 흩어져 살아도
그 뿌리를 문화에 두는 집이 많으니, 진주(晉州) 류씨 같은 경우가 그렇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풍산 류씨도 그렇다”고 하지만, 문적(文籍)이나 보첩(譜牒)이 없으니 믿을 수 없다.2)

  • 시조 류절(柳節)

    안동부 풍산현에 자리 잡고 살았다. 호장(戶長)이었다. 고려시대 호장은 향리의 백성을 지도하는 큰 어른이었다. 관아 서리와 다르다.

  • 2대 돈승(敦升)

    호장이었다.

  • 3대 정장(挺莊)

    호장이었다. 부인은 풍산 강씨(康氏)로 호장 강주(柱)의 딸이다.

  • 4대 백(栢)

    고려 충렬왕 16년에 은사(恩賜) 급제(及第) 하였다. 부인은 본관이 평산인 유씨(庾氏)로 을과 급제한 유익의 딸이다.

  • 5대 난옥(欄玉)

    도렴서 령(都染署令,염색 업무 관장, 정8품)을 지냈다.
    부인은 봉화 정씨(鄭氏)로 양온령(良醞令,술의 제조 공급 담당 정8품) 동정(同 正)인 정홍성의 딸이다.

  • 6대 보(葆)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 사신 접대 준비 직위, 종3품)이며, 사후에 판도판서(版圖判書,조선의 호조판서에 해당)로 추증되었다.
    부인은 거제 반씨(潘氏)로 친어군랑장(親御軍郞將,임금의 친위부대 정6품직)을 지낸 반윤청의 딸이다.

  • 7대 종혜(從惠)

    조선에 들어와서 공조전서(후일의 공조판서에 해당)를 지냈다. 풍산 에서 20여리 떨어진 하회 마을로 이거한 입향조이다.
    부인은 양양 군부인(襄陽郡夫人) 예천 임씨로 급제 임원길의 딸이다.
    재취부인은 영가군부인(永嘉群夫人) 안동 권씨로 군기소감 (軍器少監) 권계의 딸이다.

  • 8대 홍(洪)

    충의교위(忠毅校尉,정5품 무관)를 지냈다, 부인은 일선(一善) 김씨로 진사 김관의 딸이자 김숙자의 누이이며, 김종직의 고모이다.3)
    재취 부인은 창녕 조씨로 흥위위 보승별장(保勝別將,정7품 군직)을 지낸 조상보의 딸이다.

  • 9대 소(沼)

    서애 선생의 고조부이다. 선략장군 충무위 부호군(무보직 종4품)을 지냈으며, 통훈대부(정3품)로 추증되었다.
    부인은 안동 권씨로 절충장군 용양위호군 권옹의 딸이다.

  • 10대 자온(子溫)

    서애 선생의 증조부이다. 성균관 진사였으며, 자헌대부(정2품)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되었다.
    부인은 안동 김씨로 대사간을 지낸 김계행의 딸이다.
    장인 김계행은 성종과 연산군을 모시면서 성품이 강직하고 일을 곧게 처리하였으며 청렴한 학자로 유명하다.

  • 11대 공작(公綽)

    서애 선생의 조부이다. 통훈대부(정3품) 행 간성군수(종4품) 강릉진 관병마동첨절제사를 지냈으며,
    의정부 좌찬성(종1품) 겸 판의금부사로 추증되었다. 부인은 연안 이씨로 갑산 교수(종6품)를 지낸 이형래의 딸이다.

  • 12대 중영(仲郢)

    서애 선생의 부친이다. 황해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의정부 영의정(정1품) 겸 풍산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명종때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부정에 맞서다가 파직될 정도로 강직했고 업무 능력이 탁월했다.
    부인은 안동 김씨로 진사 김광수의 딸이다. 아들로 류운룡과 류성룡을 두었다.

  • 13대 성룡(成龍)

    영의정을 지냈다. 광국공신4) 3등과 호성공신5) 2등에 책봉되었다.
    부인은 전주 이씨로 현감을 지낸 이경의 딸이다.(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의 후손이다.) 재취 부인은 인동 장씨이다.
    슬하에 5남을 두었는데, 류여, 류단, 류진, 류초, 류첨이다. 사위는 이문영(李文英)과 조직(趙稷) 및 변응황(邊應篁)이다.

  • 서애 선생이 은퇴 후인 1606년(선조 39)에 지은 ‘종천 영모록’을 중심으로 작성하였다. 종천영모록은 2015년에 14대손 류영하가 국역(류동주 교열)하여 발간‧배포되었다.

  • 서애 선생이 종천 영모록에 쓴 ‘세보(世譜)’라는 글이다.

  • 부인 일선(선산) 김씨는 길재의 제자인 김숙자의 누이이자 김종직의 고모이다.
    이 혼인관계는 김종직이 찬술한 ‘점필재집 이준록 상(彝尊錄 上) 선공보도 제일(先公譜圖 第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사공(進士公)의 휘는 관(琯)이고 자는 온지(溫之)인데, 사재공의 셋째 아들이다. 공은 모두 2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바로 우리 선부군(김숙자)이고, 그 다음 숙치(叔淄)는 벼슬하지 않았다.
    장녀는 사정(司正) 류홍(柳洪)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만호(萬戶) 기홍경(奇洪敬)에게 시집갔다. 숙치의 아들 세 사람은 자수(自修), 곡(穀), 종순(宗順)이다.
    류홍의 아들 야거(野居)는 일찍 죽었고, 딸은 선공 주부(繕工主簿) 김삼우(金三友)에게 시집갔다”

  • 1590년(선조23)에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태조의 세계를 바로잡은 공신이다. 사절로 명나라에 다녀오거나 주문을 지은 자들을 포함하였다,
    명나라의 대명회전에는 태조가 고려의 권신이었던 이인임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었다.

  • 扈聖功臣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훈호이다.

주요 행력

  • 1세 1542년(중종 37)

    10월 1일, 의성현 사촌리 외가에서 태어나다.

  • 13세 1554년(명종 9)

    동학(東學)에 가서 ‘대학’과 ‘중용’을 강(講)하다.

  • 16세 1557년(명종 12)

    가을, 향시(鄕試)에 합격하다.

  • 17세 1558년(명종 13)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 전주이씨와 혼인하다.

  • 18세 1559년(명종 14)

    5월, 조부상을 당하다.

  • 19세 1560년(명종 15)

    10월, 관악산에서 ‘맹자’를 읽다.

  • 20세 1561년(명종 16)

    고향으로 돌아가 ‘춘추’를 읽다.

  • 21세 1562년(명종 17)

    9월, 도산에서 퇴계선생을 배알하고 ‘근사록’ 등을 배우다.

  • 23세 1564년(명종 19)

    7월,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다.

  • 24세 1565년(명종 20)

    태학에 들어가다.

  • 25세 1566년(명종 21)

    봄, 목사로 부임하는 부친을 모시고 정주로 가다.
    10월, 문과에 급제하다.
    11월,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다.

  • 26세 1567년(명종 22)

    봄, 정자가 되다.
    4월, 예문관 검열이 되다.
    8월, 퇴계선생을 송별하다. 자문마(咨文馬)의 점검을 위해 의주에 다녀오다.

  • 27세 1568년(선조 1)

    정주로 부친을 뵈러 가다.
    가을, 성주 사고(史庫)에 폭쇄(曝曬,볕에 말림))하러 가다.
    대교가 되다.

  • 28세 1569년(선조 2)

    상소하여 인종을 연은전에 모시는 것은 예(禮)가 아니라고 논하다.
    성균관 전적, 공조좌랑이 되다.
    10월, 감찰로서 성절사 이후백의 서장관이 되어 연경에 가다.
    명(明)의 태학생들이 왕양명과 진백사의 학문을 주장하자, 설문청이 종주라고 주장하다.

  • 29세 1570년(선조 3)

    3월, 돌아와 부수찬 지제교를 거쳐 수찬이 되다.
    가을, 사가독서 하다.
    정언이 되다. 12월, 퇴계선생을 곡(哭)하다.
    이조좌랑이 되다.

  • 30세 1571년(선조 4)

    3월, 예안의 퇴계선생 장례에 참석하다.
    종조숙부(5촌 당숙) 류경심을 장단에서 곡하다.
    가을, 낙수(洛水,낙동강)의 서애(西厓,翔鳳臺)에 서당을 세우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다. 이로 인해 西厓로 자호(自號)하다.

  • 31세 1572년(선조 5)

    봄, 수찬이 되다.
    이준경의 관작 추탈 논의에 대하여 부당함을 주장하다.
    9월, 원접사 종사관이 되어 의주에서 반조사(頒詔使,경사를 포고하는 조서를 가지고 오는 사신)를 맞이하였다.

  • 32세 1573년(선조 6)

    6월, 다시 이조좌랑이 되다.
    7월, 부친상을 당하고 12월에 천등산 금계에 장사지내다.

  • 34세 1575년(선조 8)

    9월, 부교리가 되고 이후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

  • 35세 1576년(선조 9)

    1월, 원지정사가 완성되다.
    4월, 헌납이 되어 조정에 돌아오다.
    검상,전한,부응교가 되다.

  • 36세 1577년(선조 10)

    1월, 검상이 되다.
    휴가를 얻어 안동으로 귀근(歸覲,3년 마다 허용)하다.
    여름, 사인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여강서원(廬江書院)의 퇴계선생 봉안문을 짓다.
    10월, 응교가 되다.

  • 37세 1578년(선조 11)

    군기시 정, 응교, 사간을 역임하다.

  • 38세 1579년(선조 12)

    봄, 직제학이 되다.
    4월, 동부승지 지제교가 되다.
    7월,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사체(辭遞)하고 부제학이 되다.
    겨울, 다시 승지가 되다.

  • 39세 1580년(선조 13)

    봄, 부제학이 되었으나 상소하여 걸양하니 상주목사에 특배되다.

  • 40세 1581년(선조 14)

    봄, 부제학이 되다.
    겨울, 얼음이 얼지 않아 동료들과 ‘진차10조(陳箚十條)’를 올리다.
    왕명으로 ‘대학연의’를 초(抄)하여 올리다

  • 41세 1582년(선조 15)

    봄, 대사간이 되다.
    우부승지가 되었다가 도승지에 특배되다.
    대사헌이 되다.
    왕명으로 ‘황화집서(皇華集序)’를 지어 올리다.

  • 42세 1583년(선조 16)

    1월, 부제학이 되다. 휴가를 얻어 안동으로 귀근하다.
    이언적의 ‘구경연의(九經衍義)’ 발(跋)을 쓰다.
    2월, 니탕개의 난으로 ‘북변헌책의(北變獻策議)’를 올리다.
    7월, 함경도 관찰사가 되고 9월에 대사성이 되었으나, 모두 친병(親病,어머니의 병환)으로 나아가지 않다.
    10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다.

  • 43세 1584년(선조 17)

    여름, 진주에서 최영경을 방문하다.
    7월, 부제학이 되다.
    8월, 왕명으로 ‘문산집서(文山集序)를 짓다.
    예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 제학이 되다.
    9월, 형 류운룡이 인동 현감이 되어 모부인을 모시니, 이후 누차 성근(省覲)하다.

  • 44세 1585년(선조 18)

    3월, 왕명으로 ‘정충록발(精忠錄跋)’을 짓다.
    황명으로 ‘포은집’을 교정하고 발문을 짓다.

  • 45세 1586년(선조 19)

    3월, 휴가를 얻어 환향하다.
    군위의 남계서당이 완성되다.
    옥연서당이 완성되다.
    길야은(吉冶隱) ‘지주중류비음기(砥柱中流碑陰記)’를 짓다.
    백담 구봉령을 곡하다.

  • 46세 1587년(선조 20)

    3월, 퇴계집을 편차하다.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다.

  • 47세 1588년(선조 21)

    형조판서 겸 양관 대제학이 되다.

  • 48세 1589년(선조 22)

    봄,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다.
    6월, 왕명으로 ‘효경대의발(孝經大義跋)’을 짓다.
    7월, 부인 이씨가 졸하다.
    9월, 예조판서가 되다.
    10월, 정여립 옥사가 일어나자 상소하여 자핵(自劾)하다.
    이조판서에 특배되다.

  • 49세 1590년(선조 23)

    5월 우의정이 되다.
    종계 개정으로 광국공신 3등, 풍원부원군에 봉해지다.

  • 50세 1591년(선조 24)

    2월, 특명으로 이조판서를 겸하다.
    좌의정이 되고 이조판서를 겸하다.
    명나라에 왜정(倭情)을 통보하자고 요청하다.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하다.
    이일을 경상우수사의 후임으로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진관법 실시를 청하다.
    7월, 대제학을 겸하다.

  • 51세 1592년(선조 25)

    4월, 신립과 병사(兵事)를 논하다.
    (임란 발발에 따라) 특명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가 되다.
    세자책봉을 건의하여 광해군을 세자로 삼다.
    경상우병사 김성일의 사면을 청하여 허락받다.
    5월, 개성에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곧 파직되다.
    의주에서 계사를 올려 시무를 논하다.
    9월, 건주위가 원병을 보내겠다는 제의를 거절하라고 상차하다.
    12월,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평양탈환을 의논하다.

  • 52세 1593년(선조 26)

    1월, 3도 도체찰사가 되다.
    4월, 이여송이 화의하는 것에 정문(呈文)을 보내다.
    10월, 호가(扈駕)하여 환도, 훈련도감 설치를 청하다.
    다시 영의정이 되다.

  • 53세 1594년(선조 27)

    3월, 진관법 실시를 다시 청하다.
    6월, ‘전수기의십조(戰守機宜十條)’를 올리다.
    겨울, ‘군국기무십조(軍國機務十條)’를 올리다.

  • 54세 1595년(선조 28)

    1월, 기축옥사의 신설(伸雪)을 청하다.
    10월, 경기‧황해‧평안‧함경도 도체찰사가 되다.

  • 55세 1596년(선조 29)

    1월, 사병 훈련의 규칙을 정하여 4도에 반행(頒行)하다.
    7월, 위관이 되어 이몽학의 옥사를 다스리다.

  • 56세 1597년(선조 30)

    1월, 왕명으로 경기를 순시하다.
    9월, 왕명으로 경기와 호서를 순시하다.

  • 57세 1598년(선조 31)

    4월, 임금을 모시고 서강에서 습진(習陣)하다.
    9월, 정응태 무고사건에 대한 진주사(陳奏使)가 되었으나, 빨리 출발하지 않는다는 탄핵을 받고 상차하여 자핵(自劾)하다.
    10월, 진주사와 영의정에서 체직되다.
    11월, 파직되다.
    12월, 삭탈관직되다.

  • 58세 1599년(선조 32)

    2월, 하회로 돌아오다.
    6월, 직첩을 받았다가 다시 환수당하다.
    8월, 정곤수가 내방하다.
    9월, 형 류운룡과 옥연(玉淵)에서 뱃놀이하다.

  • 59세 1600년(선조 33)

    3월, 퇴계선생 연보를 찬하다.
    8월, 보허대(步虛臺)를 증축하고 달관대(達觀臺)로 개명하다.
    11월, 직첩을 받다.

  • 60세 1601년(선조 34)

    3월, 형 류운룡이 졸하다.
    8월, 모친상을 당하다.

  • 61세 1602년(선조 35)

    2월, 신종록(愼終錄)을 짓다.
    4월, 영모록(永慕錄)을 짓다.
    겨울, 상례고증을 편찬하다.
    염근리(廉謹吏, 청백리)에 선발되다.

  • 63세 1604년(선조 37)

    3월, 복직되고 부원군이 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양하고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를 빌다.
    7월, 호성공신이 되다.
    정경세와 학문에 대해 논하다.
    양명집을 읽다.

  • 64세 1605년(선조 38)

    1월, ‘지행설’과 ‘지행합일설’을 짓다.
    3월, 봉조하(奉朝賀) 녹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다.
    아들 류여가 졸하다.
    9월, 서미동으로 옮기다.
    조카사위 김홍미를 곡하다.
    ‘제왕기년록’을 짓다.

  • 65세 1606년(선조 39)

    3월, 서미동에 초당 농환재(弄丸齋)를 짓다.
    ‘조명설(釣名說)’을 짓다.
    전후로 받은 비답과 유지를 모아 ‘성유록(聖諭錄)’을 만들고 발(跋)을 짓다.
    8월, 하회로 돌아오다.
    9월, 서미동으로 돌아가다.

  • 66세 1607년(선조 40)

    2월, 초당으로 거처를 옮기다.
    3월, 임금이 내의(內醫)를 보내다.
    4월, 유소(遺疏)를 초하다.
    병중에 지은 시를 모아 ‘관화록(官話錄)’을 만들게 하다.
    5월 6일, 졸하다. 임금이 승지를 보내 조문하다.
    7월, 풍산현 수동리에 장사지내다.

  • 1614년(광해군 6)

    4월, 병산서원에 위판을 봉안하고 석다례(釋茶禮)를 행하다

  • 1620년(광해군 12)

    9월, 병산의 위판을 받들어 여강서원의 퇴계선생묘에 부향하다.

  • 1627년(인조 5)

    7월, 정경세가 행장을 짓다.
    10월, 군위의 남계서원에 위판을 봉하다.

  • 1629년(인조 7)

    2월,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다.
    3월, 병산서원에 위판을 다시 봉안하다.

  • 1631년(인조 9)

    10월, 상주의 도남서원에 위판을 봉안하다.

  • 1633년(인조 11)

    봄, 합천 해인사에서 문집을 초간하다.

  • 1643년(인조 21)

    10월, 용궁현의 삼강서원에 위판을 봉안하다.
    중동으로 이장하다.

  • 1689년(숙종 15)

    의성현의 빙산서원(氷山書院)에 위판을 봉안하다.

  • 1894년(고종 31)

    하회 옥연정사에서 문집을 중간하다.

출처 : 한국문집총간 서애집 해제(1998년, 신승운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