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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
1542년(중종 37)
10월 1일, 의성현 사촌리 외가에서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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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1554년(명종 9)
동학(東學)에 가서 ‘대학’과 ‘중용’을 강(講)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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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1557년(명종 12)
가을, 향시(鄕試)에 합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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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1558년(명종 13)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 전주이씨와 혼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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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1559년(명종 14)
5월, 조부상을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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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1560년(명종 15)
10월, 관악산에서 ‘맹자’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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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1561년(명종 16)
고향으로 돌아가 ‘춘추’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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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
1562년(명종 17)
9월, 도산에서 퇴계선생을 배알하고 ‘근사록’ 등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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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
1564년(명종 19)
7월,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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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1565년(명종 20)
태학에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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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세
1566년(명종 21)
봄, 목사로 부임하는 부친을 모시고 정주로 가다.
10월, 문과에 급제하다.
11월,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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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1567년(명종 22)
봄, 정자가 되다.
4월, 예문관 검열이 되다.
8월, 퇴계선생을 송별하다. 자문마(咨文馬)의 점검을 위해 의주에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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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1568년(선조 1)
정주로 부친을 뵈러 가다.
가을, 성주 사고(史庫)에 폭쇄(曝曬,볕에 말림))하러 가다.
대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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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
1569년(선조 2)
상소하여 인종을 연은전에 모시는 것은 예(禮)가 아니라고 논하다.
성균관 전적, 공조좌랑이 되다.
10월, 감찰로서 성절사 이후백의 서장관이 되어 연경에 가다.
명(明)의 태학생들이 왕양명과 진백사의 학문을 주장하자, 설문청이 종주라고 주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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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
1570년(선조 3)
3월, 돌아와 부수찬 지제교를 거쳐 수찬이 되다.
가을, 사가독서 하다.
정언이 되다. 12월, 퇴계선생을 곡(哭)하다.
이조좌랑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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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
1571년(선조 4)
3월, 예안의 퇴계선생 장례에 참석하다.
종조숙부(5촌 당숙) 류경심을 장단에서 곡하다.
가을, 낙수(洛水,낙동강)의 서애(西厓,翔鳳臺)에 서당을 세우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다. 이로 인해 西厓로 자호(自號)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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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
1572년(선조 5)
봄, 수찬이 되다.
이준경의 관작 추탈 논의에 대하여 부당함을 주장하다.
9월, 원접사 종사관이 되어 의주에서 반조사(頒詔使,경사를 포고하는 조서를 가지고 오는 사신)를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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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세
1573년(선조 6)
6월, 다시 이조좌랑이 되다.
7월, 부친상을 당하고 12월에 천등산 금계에 장사지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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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세
1575년(선조 8)
9월, 부교리가 되고 이후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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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
1576년(선조 9)
1월, 원지정사가 완성되다.
4월, 헌납이 되어 조정에 돌아오다.
검상,전한,부응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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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
1577년(선조 10)
1월, 검상이 되다.
휴가를 얻어 안동으로 귀근(歸覲,3년 마다 허용)하다.
여름, 사인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여강서원(廬江書院)의 퇴계선생 봉안문을 짓다.
10월, 응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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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세
1578년(선조 11)
군기시 정, 응교, 사간을 역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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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세
1579년(선조 12)
봄, 직제학이 되다.
4월, 동부승지 지제교가 되다.
7월,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사체(辭遞)하고 부제학이 되다.
겨울, 다시 승지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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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세
1580년(선조 13)
봄, 부제학이 되었으나 상소하여 걸양하니 상주목사에 특배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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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
1581년(선조 14)
봄, 부제학이 되다.
겨울, 얼음이 얼지 않아 동료들과 ‘진차10조(陳箚十條)’를 올리다.
왕명으로 ‘대학연의’를 초(抄)하여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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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세
1582년(선조 15)
봄, 대사간이 되다.
우부승지가 되었다가 도승지에 특배되다.
대사헌이 되다.
왕명으로 ‘황화집서(皇華集序)’를 지어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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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세
1583년(선조 16)
1월, 부제학이 되다. 휴가를 얻어 안동으로 귀근하다.
이언적의 ‘구경연의(九經衍義)’ 발(跋)을 쓰다.
2월, 니탕개의 난으로 ‘북변헌책의(北變獻策議)’를 올리다.
7월, 함경도 관찰사가 되고 9월에 대사성이 되었으나, 모두 친병(親病,어머니의 병환)으로 나아가지 않다.
10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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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세
1584년(선조 17)
여름, 진주에서 최영경을 방문하다.
7월, 부제학이 되다.
8월, 왕명으로 ‘문산집서(文山集序)를 짓다.
예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 제학이 되다.
9월, 형 류운룡이 인동 현감이 되어 모부인을 모시니, 이후 누차 성근(省覲)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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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세
1585년(선조 18)
3월, 왕명으로 ‘정충록발(精忠錄跋)’을 짓다.
황명으로 ‘포은집’을 교정하고 발문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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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세
1586년(선조 19)
3월, 휴가를 얻어 환향하다.
군위의 남계서당이 완성되다.
옥연서당이 완성되다.
길야은(吉冶隱) ‘지주중류비음기(砥柱中流碑陰記)’를 짓다.
백담 구봉령을 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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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세
1587년(선조 20)
3월, 퇴계집을 편차하다.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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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세
1588년(선조 21)
형조판서 겸 양관 대제학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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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세
1589년(선조 22)
봄,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다.
6월, 왕명으로 ‘효경대의발(孝經大義跋)’을 짓다.
7월, 부인 이씨가 졸하다.
9월, 예조판서가 되다.
10월, 정여립 옥사가 일어나자 상소하여 자핵(自劾)하다.
이조판서에 특배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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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세
1590년(선조 23)
5월 우의정이 되다.
종계 개정으로 광국공신 3등, 풍원부원군에 봉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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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세
1591년(선조 24)
2월, 특명으로 이조판서를 겸하다.
좌의정이 되고 이조판서를 겸하다.
명나라에 왜정(倭情)을 통보하자고 요청하다.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하다.
이일을 경상우수사의 후임으로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진관법 실시를 청하다.
7월, 대제학을 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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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세
1592년(선조 25)
4월, 신립과 병사(兵事)를 논하다.
(임란 발발에 따라) 특명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가 되다.
세자책봉을 건의하여 광해군을 세자로 삼다.
경상우병사 김성일의 사면을 청하여 허락받다.
5월, 개성에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곧 파직되다.
의주에서 계사를 올려 시무를 논하다.
9월, 건주위가 원병을 보내겠다는 제의를 거절하라고 상차하다.
12월,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평양탈환을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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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세
1593년(선조 26)
1월, 3도 도체찰사가 되다.
4월, 이여송이 화의하는 것에 정문(呈文)을 보내다.
10월, 호가(扈駕)하여 환도, 훈련도감 설치를 청하다.
다시 영의정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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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세
1594년(선조 27)
3월, 진관법 실시를 다시 청하다.
6월, ‘전수기의십조(戰守機宜十條)’를 올리다.
겨울, ‘군국기무십조(軍國機務十條)’를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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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세
1595년(선조 28)
1월, 기축옥사의 신설(伸雪)을 청하다.
10월, 경기‧황해‧평안‧함경도 도체찰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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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
1596년(선조 29)
1월, 사병 훈련의 규칙을 정하여 4도에 반행(頒行)하다.
7월, 위관이 되어 이몽학의 옥사를 다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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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세
1597년(선조 30)
1월, 왕명으로 경기를 순시하다.
9월, 왕명으로 경기와 호서를 순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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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세
1598년(선조 31)
4월, 임금을 모시고 서강에서 습진(習陣)하다.
9월, 정응태 무고사건에 대한 진주사(陳奏使)가 되었으나, 빨리 출발하지 않는다는 탄핵을 받고 상차하여 자핵(自劾)하다.
10월, 진주사와 영의정에서 체직되다.
11월, 파직되다.
12월, 삭탈관직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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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세
1599년(선조 32)
2월, 하회로 돌아오다.
6월, 직첩을 받았다가 다시 환수당하다.
8월, 정곤수가 내방하다.
9월, 형 류운룡과 옥연(玉淵)에서 뱃놀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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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세
1600년(선조 33)
3월, 퇴계선생 연보를 찬하다.
8월, 보허대(步虛臺)를 증축하고 달관대(達觀臺)로 개명하다.
11월, 직첩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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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
1601년(선조 34)
3월, 형 류운룡이 졸하다.
8월, 모친상을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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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세
1602년(선조 35)
2월, 신종록(愼終錄)을 짓다.
4월, 영모록(永慕錄)을 짓다.
겨울, 상례고증을 편찬하다.
염근리(廉謹吏, 청백리)에 선발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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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세
1604년(선조 37)
3월, 복직되고 부원군이 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양하고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를 빌다.
7월, 호성공신이 되다.
정경세와 학문에 대해 논하다.
양명집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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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세
1605년(선조 38)
1월, ‘지행설’과 ‘지행합일설’을 짓다.
3월, 봉조하(奉朝賀) 녹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다.
아들 류여가 졸하다.
9월, 서미동으로 옮기다.
조카사위 김홍미를 곡하다.
‘제왕기년록’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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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세
1606년(선조 39)
3월, 서미동에 초당 농환재(弄丸齋)를 짓다.
‘조명설(釣名說)’을 짓다.
전후로 받은 비답과 유지를 모아 ‘성유록(聖諭錄)’을 만들고 발(跋)을 짓다.
8월, 하회로 돌아오다.
9월, 서미동으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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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세
1607년(선조 40)
2월, 초당으로 거처를 옮기다.
3월, 임금이 내의(內醫)를 보내다.
4월, 유소(遺疏)를 초하다.
병중에 지은 시를 모아 ‘관화록(官話錄)’을 만들게 하다.
5월 6일, 졸하다. 임금이 승지를 보내 조문하다.
7월, 풍산현 수동리에 장사지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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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4년(광해군 6)
4월, 병산서원에 위판을 봉안하고 석다례(釋茶禮)를 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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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광해군 12)
9월, 병산의 위판을 받들어 여강서원의 퇴계선생묘에 부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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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인조 5)
7월, 정경세가 행장을 짓다.
10월, 군위의 남계서원에 위판을 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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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9년(인조 7)
2월,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다.
3월, 병산서원에 위판을 다시 봉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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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1년(인조 9)
10월, 상주의 도남서원에 위판을 봉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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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3년(인조 11)
봄, 합천 해인사에서 문집을 초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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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3년(인조 21)
10월, 용궁현의 삼강서원에 위판을 봉안하다.
중동으로 이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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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년(숙종 15)
의성현의 빙산서원(氷山書院)에 위판을 봉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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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 31)
하회 옥연정사에서 문집을 중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