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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 이순신은 류성룡에게 뇌물을 주고 아첨하여 자리를 보존하였다(후광세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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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룡(金海龍)이 일찍이 말하기를, “오음 상공(梧陰相公,윤두수)이 왜적들의 정세에 대해 곧장 중국 조정에 주문한 이후에 류성룡이 몹시 질투하고 의심하였는데, 오음공은 큰 도량이 있어 능히 류성룡을 포용하였다. 그러므로 류성룡이 끝내 위해(危害)를 가하지 못하여 마침내 중흥의 대업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이순신(李舜臣)이 통제사(統制使)가 되어 류성룡에게 뇌물을 주면서 아첨하여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고서 큰 공을 세웠으니, 그 도량은 당해 낼 수가 없다.” 하였다. 《가정유문(家庭遺聞)》
⇒ 후광세첩 제3권 / 문정공 사실(文靖公事實), 용사호종록(龍蛇扈從錄) - 梧陰公의 外交洞察力과 救國精神 -
------------------------------------------------------------------------ 후광세첩은 오음 윤두수의 후손이 자신의 선조를 기리기 위해 찬출한 책이나 편저자와 찬술 연대는 미상이다. 그리고 위의 글에서 나오는 김해룡이라는 사람도 임진왜란 때 활약한 장수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신상 정보는 발견하지 못했다.
위의 글은 가정 유문(글은 집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이라면서, 김해룡이라는 사람의 말을 빌어 통제사 이순신이 서애 선생에게 뇌물을 주고 자리를 보존하면서 큰 공을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선생과 심희수 등에게 전복과 유자를 보내 정을 표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1593년 9월 4일, 류상(류성룡)․ 참판 윤자신․ 지사 윤우신․ 도승지 심희수․ 지사 이일․ 안습지․ 윤기헌에게 편지를 쓰고 전복으로 정을 표해 보냈다.
1595년 9월 17일,식후에 서울에 편지를 써 보냈다. 김희번이 장계를 가지고 떠났다. 유자 서른 개를 영의정(류성룡)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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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는 재상으로서는 드물게 이재(吏才)를 구비한 기재(상촌 신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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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吏才)는 곧 도필리(刀筆吏)에나 해당되는 사항이니 귀하게 여길 것은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재상이 된 자로서 이재를 구비한 자를 찾아보기도 역시 어렵다 하겠다. 내가 젊은 나이에 조정에 이름을 올리고 낭료(郞僚)로서 거공(巨公)들 틈에 끼어 노닐었는데, 오직 서애 류성룡과 한음 이덕형, 백사 이항복 등 세 명의 상국(相國,정승)만이 이재가 넉넉했을 따름이었다. 임진년과 계사년, 왜구가 나라 안에 가득하고 중국 군대가 성을 꽉 채우던 날을 당하여 급히 전하는 격문(檄文)이 빗발치듯하고 처리할 문서가 걸핏하면 산처럼 쌓이곤 하였다. 이때 서애가 청사에 출근하면 내가 글씨를 빨리 쓴다 하여 꼭 나에게 붓을 잡도록 명하고는 입으로 부르면서 문장을 작성해 나가곤 하였는데 몇 장이 되건 아무리 긴 글이라도 풍우가 몰아치듯 신속하게 지어나가 달리는 붓을 멈출 사이가 없이 하면서도 첨삭을 가할 필요도 없이 훌륭한 문장을 완성시키곤 하였다. 자문(咨文)이나 주문(奏文)을 지을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는데 사신(詞臣)이 분부를 받들어 지어 올린다 할지라도 그 사이에 가감을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정말 기재(奇才)였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한음과 백사의 재능도 그와 짝할 만하다 하겠다.
⇒ 상촌선생집(신흠의 문집) 제52권, 구정록 상(求正錄上), 춘성록(春城錄)
----------------------------------------------------------------------- 이 글을 남긴 상촌 신흠(1566-1628, 명종 21-인조 6)은 이이를 탄핵한 동인 송응개
의 생질이자 서인 김장생의 외사촌 동생이나 외삼촌 송응개의 이이 탄핵이 지나치다
고 비판하는 등 서인으로 자정했다. 문장력이 뛰어났다. 그가 13세 때에 신동으로 소
문이 나자 서애선생이 신기하게 여기고 찾아가 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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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는 율곡의 10만 양병론에 반대하여 이산해로부터 핀잔을 들었다(은봉 안방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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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1592년) 여름 4월에 일본 적병이 대거 쳐들어왔다. 이에 앞서 10년 전에 율곡 이이 선생과 아계 이산해‧ 동강 김우옹‧ 서애 류성룡 등 여러분이 경연에 들어갔다. 율곡이 아뢰기를 “국가의 형세가 오래도록 부진하여 앞으로 재앙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10만 명의 병사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명 각 도에 1만 명 씩 두어 위급한 일에 대비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고 편안히 세월만 보내다가 안일한 습관이 형성되어 변란이 일어나면, 저자거리의 백성을 싸움터로 내몰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큰일을 그르치게 됩니다.”하였다. 그러나 좌우에서 거들어 준 이가 하나도 없었고. 서애는 심지어 일에 임하여 쓸데없이 모의하기를 좋아한다고 저지하였다. 물러 나와 서애가 율곡에게 말하기를 “지금처럼 태평무사한 때는 경연의 자리에서 성학(성인 학문)을 우선으로 삼아 힘써 권해야 하오. 그런데 군대의 일은 급한 것이 아닌데도 공은 어떠한 소견이 있기에, 우리들과 함께 의논하지도 않고 혼자서 이와 같이 아뢰는 것이오?”하니, 이에 율곡이 대답하기를 “속된 선비가 어떻게 시무를 알리오”하고는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아계가 말하기를 “이현(류성룡의 자)이 틀렸소. 숙헌(이이의 자)이 어찌 소견이 없겠는가?”하니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잠잠하였다. 율곡이 돌아다보면서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어찌 한 마디씩 하여 그 가부를 결정하지 않았소?”하자, 동강이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들이 감히 논할 바가 아니오. 알지도 못하고 말하는 것을 옛사람들이 어떻게 여겼던가요?”하였다. 이에 아계가 말하기를“숙부(김우옹의 자)는 근신하는 군자라 할 만 하오”라고 하고, 서로 웃으면서 그 자리를 파했다. 얼마 안 되어 계미년(1583년)에 북쪽 변방에서 오랑캐의 난리가 있었는데, 조정의 대신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율곡이 병조판서로써 계책을 세워 겨우 일을 진정시켰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거의 깨달은 바가 있었을 터이지만 오히려 뉘우칠 줄을 모르고, 도리어 “나라의 권력을 제멋대로 처리하고 윗사람에게 교만하게 구니,그 뜻이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는 등의 말로 헐뜯어 율곡으로 하여금 조정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 은봉전서 6권, 임진기사(안동교 역주 은봉전서 297-298쪽,2002년,신조사)
---------------------------------------------------------------- 위의 글은 은봉 안방준(1573년-1654년, 선조 6-효종 5)이 쓴 ‘임진기사’의 첫머리 부분이다. 서애 선생 보다 31세 아래인 안방준은 전남 보성 출신이며, 본관은 죽산이다. 19세 때에 파주로 우계 성혼을 찾아가 배웠다. 그리고 성혼의 손녀(성문준의 딸)를 며느리로 맞이한 사람이다. 스승인 박광전을 따라 임진왜란 당시 의병에 참여하여 호남 도체찰사였던 정철을 만나 칭찬을 들었다. 평소 정몽주와 조헌을 존경한 나머지 그들의 호인 ‘포은’과 ‘중봉’에서 한 글자씩을 취해 ‘隱峯’으로 자호하였다. 벼슬은 좋아하지 않았으며, 역사 연구에 몰두하여 서인 편향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 택당 이식의 선조수정실록 편찬에 자문 역할을 하였으며, 34세 아래의 송시열에게는 그의 아버지 송갑조 등 송씨 가문의 충절을 기리는 ‘충효전가록’24)을 지어주어 감동시켰고, 정치적인 지도를 해주는 스승이기도 하였다.
안방준은 위의 글에서 서애 선생과 율곡은 물론, 당대의 유명한 인물이자 동인인 이산해와 김우옹까지 대화자로 등장시켜 임란 10년 전에 10만 양병을 논의한 것으로 그럴듯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율곡이 10만 양병을 경연에서 주장하자 서애가 반대를 했고 경연을 파한 자리에서 이산해가 ‘율곡의 주장이 옳다’고 서애를 핀잔주는 것이 스토리의 골자이다. 그런데 이 글에 나오는 이산해는 임란 10년 전이라는 시점에 모친상을 당해 보령에 내려가 있었으므로 위의 글은 허구이다.
임진왜란이 1592년(선조 25) 4월에 시작되었으므로 임란 10년 전이라 하면 좁게 잡아 1582년(선조 15) 4월이고, 1582년 전후로 1년씩을 추가하여 넓게 잡아도 1581년-1583년간 인데, 1581년 6월-1583년 9월이라는 2년 3개월간은 이산해의 복상(服喪) 기간이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10년 전(1582년 경)에 서애․이산해․김우옹이 경연에서 양병문제를 논의했다”는 설정은 그래서 엉터리이다. 이산해의 모친상 기록은 아계연보는 물론,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와 실록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해에 공이 대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보령(保寧)으로 귀장을 하였는데, 앞서 치렀던 부친의 상례처럼 집례(執禮)를 잘 하였다(아계 연보, 1581, 선조14. 공의 나이 43세)
6월, 이조 판서 이산해가 모상(母喪)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산해는 사사로이 찾아오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로지 공변된 도리에 따라 사람을 등용했기 때문에 선비들의 의논이 모두 그의 선(善)함을 칭송하였었다. 그런데 뜻밖에 모상(母喪)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김귀영(金貴榮)이 대신하자 청탁하려는 무리들이 갓을 털고 일어나 귀영의 문간에 저자같이 모여드니 당시 사람들이 한탄하였다.(석담일기 하권 1581년선조 14)25)
전교하였다. “전 판서 이산해는 지방에서 여묘를 살고 있으니 제사지낼 물자가 또한 어찌 있겠는가. 본도로 하여금 쌀과 콩을 마련하여 제급하도록 하서(下書)하는 것이 좋겠다.”(선조실록 15년 11월 27일, 상중에 있는 홍섬ㆍ노수신ㆍ이산해에게 쌀과 콩을 하사하다)
우찬성(右贊成) 이산해(李山海)가 서울에 들어와 숙배 후 사면하였는데 두 차례에 걸쳐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선조실록 16년 9월 1일 우찬성 이산해가 숙배 후 사면하다)
이산해가 2년 3개월의 복상기간을 거쳐 조정에 모습을 나타낸 1583년 9월 이후에도 이분들이 만나서 양병 여부를 논의하는 자리는 있을 수 없었다. 서애 선생의 경우 1583년 당쟁을 피해 낙향해 있었다가 경상감사를 맡았고, 율곡은 같은 해 1월 22일 병조판서를 맡아 ‘니탕개의 난’에 대처하던 도중 6월에 동인인 송응개․박근원․허엽 등으로 부터 탄핵을 받자 자진하여 낙향해버렸다가 10월에 잠시 이조판서를 맡았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임진기사에서 서술한 것과 같은 서애‧율곡‧ 이산해‧ 김우옹의 4자 회동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였다. 게다가 안방준은 임란 10년 전인 1582년에 10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였으므로 본인이 직접 체득한 기록이 아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율곡이 남긴 기록이나 실록에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문집에도 들어있지 않다.
안방준이 위의 이야기를 쓴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이후인 163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위의 10만 양병설은 은봉전서 6권에 있는 ‘임진기사’의 앞부분에 실려 있고, 또 1663년(현종 4) 전라도 흥양현(고흥)에서 간행한 ‘은봉야사별록’에는 ‘임진록’이라는 이름으로도 실려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데, 이산해가 모친 상중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지적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을 정도로 사료 검증이 허술한 가운데 사실인 것처럼 남아 있다.
안방준의 이 기록은, 1597년(선조 30)에 김장생이 찬술한 허술했던 ‘10만 양병설’이 수 십 년 뒤 서인들이 집권하고 나서 출처도 없이 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스스로 진화(?)하는 과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안방준의 이 기록보다 한 참 뒤인 1665년(현종 6) 송시열 등에 의해 완성된 ‘율곡 연보’에는 안방준의 임진 기사 내용 중 이산해의 언급 부분은 빠지고, ‘도성에 2만‧ 각도에 각 1만’이라는 부분은 동일하게 표현된 10만 양병설이, 1584년(선조 16) 4월조에 실려 있는데, 이 ‘연보 본(本)’ 십만양병설이 원전(原典)인 김장생의 ‘가장 본(本)’ 10만 양병설 보다 구체적이기 때문에 원전을 제치고 현대에 들어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정본(定本)이 된 것은 아니다.
입대(入對)하여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였다가 불의의 변에 대비할 것을 청하였다.
선생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국세가 부진함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10년이 못 가서 토붕(土崩)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데 미리 10 만의 군사를 길러서 도성에 2만 명을 배치하고 각 도에 1만 명씩을 배치하여, 그들의 조세를 덜어주고 무재를 훈련시켜 6개월로 나누어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가, 변란이 있을 경우에는 10만 명을 합쳐서 파수하게 하여 위급할 때의 방비로 삼으소서. 이와 같이 하지 아니하면 하루아침에 갑자기 변이 일어날 경우 시민(市民)을 몰아 전투하게 됨을 면치 못하여 결국 대사가 끝나고 말 것입니다”하였다.
류공 성룡(成龍)이 불가하다고 말하면서 아뢰기를, “ 무사한 때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곧 화단을 양성하는 것입니다”하였다. 이에 연신(筵臣)들이 모두 선생의 말을 지나친 염려라고 하여 끝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선생은 물러나와 류공에게 말하기를 “속유(俗儒)들이야 진실로 시의(時宜)를 알지 못하거니와 공도 또한 그런 말을 하는가”하고서 이어 오랫동안 수심에 잠겨 있었다.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류공이 조당(朝堂)에서 탄식하기를, “이문성26)은 참으로 성인이다” 하였다.27)
24) 안방준은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가 1617년(광해군 9)에 사마시(초시)에 합격한 다음 서궁에 유폐되어 있는 인목대비를 홀로 찾아가 숙배한 사건 등을 엮은 글이다. 당시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의해서 궁에 유폐되어 있었고, 따라서 모두들 광해군의 두려워 배알하지 못했지만 송갑조는 두려워하지 않고 신하로서의 예를 취해 칭송을 받았다는 이야기이다(은봉전서 9권 서, ‘충효전가록을 지평 송영보에게 주면서 쓴 서문’) 25) 이 내용은 선조수정실록 14년 6월 1일자 기사에도 ‘이조 판서 이산해가 모친상으로 직위를 떠나자 김귀영으로 대신하다’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석담일기의 내용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26) 문성(文成) 율곡의 시호이다. 율곡의 시호는 서애 선생 사후인 인조 1624년(인조 2)에 내려진 것이어서 선생이 생전에 ‘이문성은 성인이다’고 말하였을 리가 없다는 주장이 한동안 10만양병설의 허구를 입증하는 사례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이문성’이라는 표현은 1814년(순조 14)에 중간(重刊)된 율곡전서에만 있을 뿐, 그 이전의 판본에서는 모두 ‘이문정(文靖)은 진성인이다’라고 되어 있어, 원래의 표현이 ‘이문정’임은 확실하다. 순조 14년 판 율곡전서에서 ‘이문성’으로 표현된 것은 간행 담당자가 율곡의 시호를 좇아 임의로 고친 것으로 보인다. 이문정은 송나라 진종 때 선견지명이 있는 승상으로 알려져 있어 율곡 가장과 연보 등에서 ‘이문정은 진성인이다’라는 말을 넣은 것은 서애 선생이 율곡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중국의 고사를 동원한 것일 뿐이다. 27) 국역 율곡전서 Ⅶ, 109-110쪽 연보 선생 48세, 계미년 1583년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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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는 삼공의 지위에 있었으나 청빈하며 정치가 공평하고 밝았다(하담 김시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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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서애는 소싯적부터 문장과 학행(學行)이 당시의 추앙을 받았다. 비록 오랫동안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었으나 청빈하기가 한미(寒微)한 선비와 같았다. 정치하는 것이 공평하고 밝으니,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움으로 벼슬을 구하지 못하였다.
임진년의 큰 난리 뒤에 공은 영상으로서 국정을 담당하여 쉴 사이 없이 부지런히 경영하면서 마음을 태우고 정성을 다하였다. 모든 국가에 이익이 될 만한 일이면 남의 말은 돌아보지 않았다. 도감(都監)을 창립하고, 군적을 통융(通融)하게 하였으며, 공안을 개정하여 지금까지도 혜택을 입게 하였다. 악한 것을 제거하고 착한 것을 권장하여 차츰 형적을 두게 되더니, 마침내 이것으로 간인(奸人)의 참소를 입고 조정을 떠나 안동의 옛집으로 돌아가서 10년 동안 벼슬하지 않고 지내다가 죽으니, 조야가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성품이 겸손하고 언어가 온화하고 공손하여 남의 앞에서 얼굴빛이 변하면서 놀라는 일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골경(骨鯁)한 풍도가 적었으므로 구비된 군자가 되기를 기대하는 자는 한이 없지 않았다.
⇒ 부계기문(김시양 저)
----------------------------------------------------------------------------- 김시양(1581-1643, 선조 14-인조 21)은 본관이 안동이며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광
해군 때에 향시에 출제한 시제(試題)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했다 하여 종성으로 유
배되었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이괄의 난 때에 도체찰사 이원익의 종사관을 역임했
으며, 경상도 관찰사와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부계는 종성의 다른 이름으로 부계기문
은 종성에 유배되었을 때 당대의 정치사를 기록했던 책이다. 이외에도 하담파적록과
하담집이 있다. 청백리에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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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공에게 책임을 내려주어 국가를 중흥시킨 것은 너무나 명백(동주 이민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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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국가를 보호하여 붙들려고 할 때에는, 갑자기 전복될 것 같은 재난이 가득 찼거나 비색(否塞)한 뒤에 발생할 조짐이 있으면, 반드시 훌륭한 보좌(補佐)를 탄생시켜 그에게 재능과 덕망 그리고 보불(黼黻)의 문장을 주어 그로 하여금 하늘의 운행을 두루 다스리면서 나라의 운명도 이어 가게 한다.
처음 공이 특별히 알아주는 선조(宣祖)의 뜻을 받들어 조용히 조정에 나아가서 도리에 맞게 진퇴하니, 온 세상이 참된 선비[眞儒]라고들 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종묘와 사직이 유리되면서 공의 쓰임은 더욱 드러났다. 초망(草莽)하였을 적의 방어를 담당하고 전쟁 중에 왕명을 받들 때에, 국가에서 하루도 공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여 내외와 남북의 중책을 도맡겼으니, 하늘이 공에게 책임을 내려 주어 국가를 중흥시켜서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만들게 한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공은 도를 본받고 나라를 다스리는 문장으로써 사무를 처리하며, 가까운 곳에서 원리를 체득하며, 만 가지로 수작하는 것은 모두 경술로 기본을 삼아 천지에 세워 두고 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천운을 이끌어 가면서 국가를 반석같이 안정되게 하였다.---내가 공의 글을 읽다가 무술년(1598, 선조31) 이후의 일에 이르러서는 군자의 도가 굽히고 펼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공은 이미 바른 도리와 곧은 행동으로 공로를 드러냈으나, 이미 참소하는 무리들이 떠드는 비방을 이기지 못하였고, 시대가 차차 안정되어 가건만 공은 이미 조정을 편하게 여기지 않고 낙동강 가 풍산(豊山)의 조용한 시골을 좋아하였다. 이윽고 전에 떠들며 비방하던 자들은 정말 공을 이긴 것 같았다. 그러나 공이 조정을 떠나자, 말하던 자들은 점차 굴복하였고, 공이 돌아가시자 더욱 심하게 굴복하여 도리어 부녀들과 주졸(走卒)들의 공론도 이기지 못하게 되었다.---숭정(崇禎) 계유년(1633) 4월 10일 신미에, 후학 통정대부 이조 참의 지제교 이민구(李敏求)는 서한다.
⇒ 이민구, 서애집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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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지금까지 편안히 살고 생업에 종사하게 된 것은 모두 서애의 덕분(미수 허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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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장수와 정승의 명을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 한 몸에 모두 받아 의리를 밝게 보고 일에 바르게 임하였으며, 충성을 다하여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않았다. 행한 일을 살펴보면 시종 도덕의 바름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 요점이니, 공은 덕혜(德慧)와 술지(術智)가 있으면서 예와 음악으로 문채를 낸 분이라고 할 만하다. 조정의 연세 높은 노신들로부터 노련한 장수와 오래 근무한 관리에 이르기까지 ‘상국(相國)의 충성’을 말하지 않은 이가 없으니, 그렇다면 힘을 다해 주선하여 넘어지고 위태로운 것을 능히 붙들고 지탱해서 끝내 왕업(王業)을 다시 안정시키고 백성의 부자와 형제가 서로 보전하여 지금까지 옷 잘 입고 밥 잘 먹으며 편안히 살고 즐겁게 생업에 종사하게 된 것은 과연 누구의 힘이겠는가. 공은 사물에 통달하고 민첩하며, 학문은 넓고 성품은 고아하였다. 문장에 능하였는데, 특히 사명(詞命)을 잘 지었다. 거처하던 곳에 있는 서애(西厓)의 절경을 좋아하여 자호(自號)를 서애라고 하였다.
⇒ 허목, 기언 38권, 동서기언(東序記言), 서애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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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懲毖錄)을 읽고 감회를 읊다(갈암 이현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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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대왕 일찍이 서쪽으로 몽진하실 때 / 宣王昔遭西狩憂
한 모퉁이 용만28)에서 왕업이 어려웠었네 / 一隅龍灣王業艱 임금이 총명한 어진 신하들의 보필에 힘입어 / 主賴聰明輔由哲 한 번의 지휘로 위태로운 나라를 안전하게 만들었네 / 轉危措安指揮間 위로 천심을 감동시켜 천자가 눈살을 찌푸렸고 / 上格天心彩眉顰 아래로 피눈물로 얼룩진 백성들을 위로하였네 / 下慰黎元血淚斑 천병은 평양성에서 승리하고 / 天兵奏凱平壤城 우리 군사는 남해에서 무위를 떨쳤네 / 我師揚武南海灣 요사한 기운 모두 걷어내고 옛 도읍 회복하니 / 妖氛豁盡舊都復 죄를 꾸짖고 공을 치하하며 거가가 돌아왔네 / 策罪課功車駕還 천도는 무상(無常)하여 치란이 갈마드니 / 天道難常治亂迭 나라가 안정되자 임금은 세상을 떠나셨네 / 鼎湖龍騰鳳去霄 사십 년 뒤에 다시 병란29)이 일어 / 四十年來復瘡痍 남한산성의 깊은 수치는 씻을 수 없네 / 南漢深羞磨不銷 저들의 위세에 겁을 먹어 온 나라가 어지러우니 / 怯威趨風擧國迷 북쪽으로 가는 사신 빈번할 뿐 명나라는 아득하기만 하네 / 北使徒頻天路遙 조당의 관원들 더 이상 중국의 법도가 없고 / 朝堂無復漢官儀 도성에는 오랑캐 말만 시끄럽게 들리네 / 城闕徒聞胡語喧 뭇 관료들 경국의 계책을 진달하는 자 없고 / 千官莫陳經國謨 지존은 군려가 번거로운 것을 깊이 꺼리시네 / 至尊深憚軍旅煩 오직 북쪽 오랑캐의 활과 말이 강한 줄만 아니 / 唯知北虜弓馬勁 어찌 우리에게 빼어난 산천이 있음을 생각하리 / 豈料在我山川奇 일단의 군대로 깊이 쳐들어가 오랑캐 소굴을 뒤엎지 못할지라도 / 縱不懸兵覆豺穴 우리나라의 형세를 이용하더라도 해 볼 만한 것이네 / 據國形便猶足爲 더구나 지금 호병은 세 변방을 대적하느라 / 況今胡兵敵三陲 군대는 쇠잔하고 자주 지쳐 있으니 / 師老爲殘數爲疲 전쟁이란 상대가 지친 틈을 이용함은 옛 책에 있는 말이니 / 兵乘勞悴古之經 요동을 제압하기는 지금이 좋은 때이네 / 控制遼壃誠得時 산동에 격문을 보내면 누가 떨쳐 일어나지 않겠으며 / 投檄山東孰不奮 제도(諸道)에 군대를 징발하면 누가 감히 지체하겠는가 / 徵發諸州誰敢遲 삼한의 재력이 적다고 말하지 말라 / 休道三韓財力綿 조그마한 고구려도 일찍이 수나라를 대적했느니 / 一片丸都曾敵隋 몸은 초야에 묻혀 있고 구중궁궐은 깊으니 / 身潛草野九重深 어리석은 충정 베풀 곳 없음이 한스럽네 / 獨恨愚衷無所施 빈말은 보탬이 없고 허물만 초래하니 / 空言無補只招尤 진편30)을 덮어 놓고 두 줄기 눈물만 흘리네 / 掩著陳篇雙涕垂
⇒ 갈암집 별집 제1권 / 시(詩), 기축년(1649, 인조 27)
---------------------------------------------------------------------- 갈암 이현일(1627-1704)이 인조 27년에 징비록을 읽고, 병자호란의 국치를 당한 아
쉬움과 함께 설욕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남긴 시(時)이다.
28) 의주의 별칭 29) 병자호란 30) 진편(陳編) : 《시경(詩經)》 〈월출(月出)〉에, “달이 떠서 환하게 비추니 아름다운 사람이 어여쁘도다. 〔月出皎兮 佼人僚兮〕”에서 인용한 말로, 뒤에 달을 읊은 시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여기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의 〈한산도가(閑山島歌)〉를 가리킨다.(국역 갈암집 주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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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류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가 없다.(회은 남학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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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원익(李元翼)은 속일 수는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류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없다.”고 하였다.
⇒ 회은집(晦隱集) 인용 연려실기술 18권, 선조조 고사본말, 선조조의 상신 류성룡
----------------------------------------------------------------------------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이 글은 회은 남학명((1654-?,효종5-?)의 문집에서 발췌한 것
으로 되어 있다. 남학명은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서인의 영수 남구만의 아들이다.
이 글은 당파를 초월하여 이원익의 인간적인 순박함과 서애 선생의 예리한 통찰력을
동시에 칭송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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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경세문은 서애가 제일(몽예 남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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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1712, 숙종 38) 7월 29일, 서애집을 읽어 보았다. 우리나라 경세문은 마땅히 서애가 제일이었다. 말의 기운이 매우 따뜻하고 인정미가 있으며, 논의가 매우 정밀한 것이 상세하게 조사된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 몽예집(夢囈集,남극관의 문집), 雜著 十首, 단거일기(端居日記)
---------------------------------------------------------------------------- 이 글은 남극관(1689-1714, 숙종 15- 숙종 40)이 자신의 문집인 몽예집의 단거일기
(독후감)에 남긴 것이다. 남극관은 남구만의 손자이자 회은 남학명의 아들로서 바로
위에 있는 아버지의 글에서 보듯이 서인 명문가의 부자(父子)가 함께 서애선생을 칭
송한 것이 이채롭다. 남학명이 서애집을 읽은 1712년은 임진왜란 2주갑에 해당되는
해이며 본인으로서는 24세의 젊은 나이었다. 즉 서애집 독후감은 당쟁에 때 묻지 않
은 젊음이가 바라본 객관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남극관은 안타깝게도 그로부터
2년 뒤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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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이 선생의 시 ‘우영(偶詠)’을 제자 이희조에게 읊어 주다(송시열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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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하루 저녁 대청 사이를 산보하셨다. 나도 이형(李兄 이행(李荇)을 가리킨다)과
함께 뜰에서 마주 섰었는데, 선생은 시 한 수를 외시고 그 뜻을 해석해 주셨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에서 찬 이슬 떨어져 / 玄天墮寒露 푸른 연꽃잎에 방울져 있네 / 滴在靑荷葉 물의 성품은 일정한 태도가 없는데 / 水性無定態 연꽃 가지는 기울고 거꾸러짐 좋아하네 / 荷枝喜傾倒 둥글고 맑은 물방울 사랑스럽긴 하나 / 團明雖可愛 흩어지면 도리어 잃기 쉽네 / 渙散還易失 그대와 함께 사흘 밤을 앉아 / 從君坐三夜 마음을 편안히 하는 방법을 묻노라 / 請問安心術
나는 이에 이렇게 청하였다. “소생들이 여기에 온 지 이미 사흘이 되었는데, 이 시구
는 바로 지금 저희들의 일을 써 놓았습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마음을 편안히 하는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생(송시열)] ‘여기에 한 물건(마음을 가리킴)이 있으니, 쥐면 깨지고 쥐지 않으면 떨
어진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 선유(先儒)의 말씀이다. 뒤에 그 시를 상고해 보니, 류서애(柳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집에 실려 있었다.
⇒ 송자대전, 부록 제14권, 어록 1, 이희조의 기록, 계축년(1673년, 현종 14) 2월
---------------------------------------------------------------------- 위의 시는 서애본집 1권, 시(時) 28면에 있는 ‘우영(偶詠,우연히 읊다)’ 이다. 국역
류성룡 시 1권31)의 경우 120쪽에 있다. 송시열이 읊은 것은 서애집의 것과 몇 글자
다르나, 갈등과 어려움 속에서 마음이 평정을 추구하려는 의미는 대체로 비슷하다.
송시열은 이희조에게 이 시를 읊고 나서 ‘선유(先儒)의 말씀’이라고 했고, 이희조는
나중에 이 시가 서애선생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중요한 것은 골수 서인인 송
시열이 남인의 종사였던 서애 선생의 시를 제자에게 읊어주었다는 점이다. 1673년(현종 14)이라면, 2차 예송 1년 전이어서 송시열이 아직 남인의 공세에 피해를
보지 않았던 시점이며, 노론과 소론으로도 분기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이희조(1655-1724, 효종 6-경종 4)는 본관이 연안이고 부제학을 지낸 이단상의 아들
이며 송시열의 제자이다.
31) 류명희 역, 2011년, 서애선생기념사업회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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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청백(성호 이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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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서애(柳西厓)가 조정에서 불안을 느끼고 물러가자, 그 탄핵에, “세 곳의 전장(田莊)이 미오(郿塢)보다 더하다.”고 하였다.그 당시 국가에서 청백리(淸白吏)를 뽑는데 서애가 들었으니, 이는 백사(白沙 이항복의 호) 이상국(李相國)의 뜻이었다. 백사가 어느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탄핵이 류 상국에게는 그 경중이 될 바가 없고, 다만 다른 간사한 무리들을 경고하기 위하여 미오(郿塢)32) 두 자를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서애가 세상을 떠남에 이르러 집에는 남은 재산이 없어 여러 아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 거의 살아갈 도리가 없었다.
정우복(鄭愚伏)이 류계화(柳季華 류성룡의 아들 진(袗), 계화는 자)에게 준 시에,
하상의 유업 시서뿐이니 / 河上傳家只墨庄 자손들 나물밥도 채우기 어려워라 / 兒孫蔬糲不充膓 어쩌다, 십 년을 정승 자리 있으면서 / 如何將相三千日 성도의 뽕나무 팔백 주도 없었던가33) / 倂欠成都八百桑
라 하였고, 또 “참소하는 사람들이 이 말을 듣는다면 그 얼굴이 뜨거울 것이라.”고 하였다. 세상에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서애가 새로 석갈(釋褐)34)이 되어 동고(東皐 이준경의 호) 이상국(李相國)을 찾아갔는데, 이상국이, ‘서울 근교에 장만한 가대(家垈)가 있느냐?’고 묻기에, ‘없다.’고 대답하자, 동고가 또, ‘벼슬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것이 있어야 편리하다.’고 하였다. 서애가 속으로 의심하면서 자못 불만스럽게 여겼는데, 후일에 갑작스레 조정에서 물러 나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사찰에 우거하여 큰 곤란을 겪게 되자, ‘당시 이상국의 말이 참으로 진리가 있었다.’고 했다.” 한다.
⇒ 성호사설 제15권, 인사문(人事門),서애 청백(西厓淸白)
--------------------------------------------------------------------------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성호 이익(1681-1763,숙종7-영조39)이 서애선생의 청백함을
기리기 위해 ‘성호사설’에 남긴 글이다. 성호 이익은 당쟁을 피해 학문에만 전념한
기호남인이다. 이 글은, 노성한 대신이었던 동고 이준경이 갓 관직에 진출한 서애선생
을 호의적으로 대했음과, 서애선생이 서울에 제대로 된 본인 소유의 가옥을 갖고 있
지 않았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32) 중국 섬서성 미현의 북쪽에 있는 지명, 후한의 동탁이 미현에 성을 쌓고 부정으로 축재한 온갖 금은보화를 쌓아두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 33) 이 말은 촉한(蜀漢)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임종시 후주(後主,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성도에 뽕나무 800주가 있습니다”라고 한 말을 상기시켜, 서애선생에게는 제갈공명이 가졌던 뽕나무 800주 조차도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34) 서민들이 입는 갈옷을 벗고 관복을 입는다는 말로, 처음 관직에 나아감을 뜻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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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서애가 맹세코 발탁하지 않았다면 개천에서 굶어 죽었을 것(성호 이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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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임진(壬辰 1592, 선조 25)의 일로 말한다 하더라도 이 충무(李忠武)는 큰 공을 세웠어도 형을 받고 귀양가게 되었다. 진실로 유서애(柳西厓) 같은 이가 맹세코 발탁하지 않았더라면 개천 속에서 굶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공을 꺼려서 남을 해치는 사람이 어느 시대인들 없겠으랴만은 이런 경우를 이야기해 봐도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내 생각에는, 임진(壬辰)년 때 국운을 존속시킨 것은 모두 충무 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으니, 마땅히 세실(世室)에 종향(從享)시켜 후인을 권장해야 할 것이라고 여긴다.
⇒ 성호사설 제23권, 경사문(經史門), 기공(忌功, 공을 꺼림)
----------------------------------------------------------------- 이 글은 이순신의 현실적인 무능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곧은 성품으로 볼 때 혼탁하기 그지없고 음모와 협잡이 판을 치는 당시의 험악하고 속된 세상에서는 출세하며 살아가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과 함께, 서애선생의 사람 보는 안목과 어린 시절에 이순신과 맺은 의리를 커서도 지킨 것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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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이항복 등은 당색이 달라도 사심 없이 힘을 합해 국가를 재건했다(창주 나학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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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리나라의 당론은 유래가 오래되었는데, 옛날에는 공적인 문제로 쟁론을 하더니 지금은 사적인 문제로 쟁론을 합니다. 옛날 선묘조(宣廟朝) 때 류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이정귀 같은 어질고 덕이 있는 신하들이 조정의 반열에 두루 있으면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표방하였는데, 색목(色目)은 비록 달랐지만 왕실을 보좌하는 일에는 마음을 합쳤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질 때는 이쪽과 저쪽의 의견 차이가 없지 않았지만, 속마음을 돌아보면 정권을 잡거나 잃는 것을 근심하는 데 얽매여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위급한 일이 닥쳐 나라가 어지러워질 때면 서로 힘을 합해 나랏일을 하였고 어려운 상황에서 임금을 지키고 국가를 다시 재건하는 업적을 이룩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나라를 중흥시킨 어진 보좌라고 일컬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서관(庶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당(黨)으로 합하여 깨뜨릴 수 없을 만큼 굳게 체결하여 나라의 관직을 거머쥐고는 개인 가문을 위하여 농단(壟斷)합니다.---
⇒ 승정원일기 영조 즉위년 11월 19일, 허결(虛結)인 환기전(還起田)에 역을 부과하는 문제, 화전(火田) 및 승려의 신역(身役)을 과도하게 부과한 일 등에 대해 진달하는 전 정언 나학천(羅學川)의 상소
------------------------------------------------------------------------ 나학천(1658-1731, 효종 9-영조 7)은 노론이었지만 형조참의로 있을 때 이인좌의 난(1728년, 영조 4)이 일어나자 ‘난적(亂賊)’으로 몰려 파직되어 고향인 영주로 피신한 적이 있었다. 강직한 성품이어서 영조에게 당쟁에 대한 직언을 하였으며, 당론에 휩쓸리지 않았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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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임란을 예견했으나, ‘이인좌의 난’은 류성룡 때문이라 한다”(영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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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명(참찬관)이 아뢰기를, “우참찬(정제두)은 70년을 초야에서 단단히 공부하였습니다. 학문의 대강에 대해서는 아까 대략 아뢰었는데, 병가(兵家)의 서적에도 정통하니 하문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좋다.”하였다. 이어 책을 덮었다. 정제두가 아뢰기를, “싸움은 멀리서 가늠하기 어려운데 어찌 함부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애는 임진년(1592, 선조25)이 되기 전에 왜란이 일어날 것을 먼저 알았는데 경(우참찬 정제두)은 어찌하여 지나치게 사양하는가. 승지가 아뢴 바가 매우 좋다. 경과 더불어 치란(治亂)에 대해 궁구하고 싶지만, 나라에 사변이 일어났으니 목전의 일을 논해야겠다.---정제두가 아뢰기를, “현재 두서가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영남의 일로 보더라도 상도(上道)35)는 바로 선정신(先正臣)36) 이황이 살았던 곳인데, 적의 변고가 상도에서는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도의 유현(儒賢)이 몇 사람인가?”하자, 이광좌(영의정)가 아뢰기를, “한강 정구, 서애 류성룡, 우복 정경세입니다. 정구와 정경세는 모두 현인(賢人)이고, 류성룡은 과목(科目)으로 출세하기는 하였지만 또한 학문을 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세(時勢)가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것은 류성룡 때문이라고 한다” 하자, 이광좌가 아뢰기를, “류성룡은 서인과 남인으로 분당한 주요 인물로서 선정신 이이(李珥)의 광명정대함만은 못하여도 그의 재주는 특출하였습니다.”하였다---
⇒ 승정원일기 영조 4년 4월 3일, 희정당에서 소대를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에 영의정 이광좌 등이 입시하여 주자(朱子)의 〈경자응소봉사(庚子應詔封事)〉를 진강(進講)하고 백성을 구제하고 싸움을 끝낼 수 있는 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 이 이야기는 남인과 소론의 일부 강경파들이 노론의 독주에 대항하여 일으킨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영조가 경연에서 영의정 이광좌와 우참찬 정제두 등과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나온 것이다. 정제두는 정몽주의 후손이며 양명학자이다. 이광좌는 이항복의 후손이다. 영조는 서애가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했듯이 정제두에게 반란의 결과를 예측해 보라고 하였는데, 이는 선생의 예지력을 전해 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조는 100년이 훨씬 넘은 시기에 존재했던 선생에게 이인좌의 난 발생의 책임을 돌리고 있는데, 이는 남인의 상징이자 종사로 추앙받는 선생으로 인해 남인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결국은 반란에 이르게 되었다는 노론들의 적대감이 영조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선생의 온건하고 합리적인 정치관과 가르침은 반란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과는 거리가 멀다.
이인좌의 난 당시는 숙종부터 이어진 서인들의 치세였고 영조 또한 노론의 힘으로 국왕이 되었기 때문에 노론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조는 이후 탕평책을 펼치기는 했고 박문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인좌의 난에 연루된 안동 출신들의 죄를 탕척해 주었지만, 그의 탕평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뿌리가 같은 소론만 포용하는 ‘소탕평’에 불과했으며, 이러한 남인 차별 현상은 세손이던 정조가 등극하고서도 상당기간 이어졌다.37) 세자 또는 세손은 태어나면서부터 보양청→강학청→시강원이라는 교육 절차를 받는데, 당시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노론의 고위층들이어서 그들로부터 주입된 교육에서 깨어나기가 쉽지 않았고, 또 힘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35) 경상도 중에서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위의 지역을 말한다. 36) 유현(儒賢)으로서 학덕이 높았으나, 현재는 작고한 신하를 말함(한국고전용어사전) 37) 일례를 들면 정조는 즉위 초에 안동의 유생 이도현‧이응원 부자가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상소하자 “저 몇 사람들을 그대로 둔다면 소굴(巢窟)을 장차 깨뜨리지 못할 것이다.”며 죽이고, 안동부를 안동현으로 강등시킨 일이 있었다. (정조실록 즉위년 8월 6일, ‘사도 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의문점 등에 관한 영남 유생 이응원의 상소문’ 및 8월 19일, ‘이도현과 이응원이 태어난 안동부를 강등하여 현으로 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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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는 무릇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과 예의와 음악, 그리고 병사(兵事)와 농정(農政)에 대한 일을 가슴속에 잔뜩 쌓아 두었다가 상자를 거꾸로 하여 쏟아 내 하였다. (정조의 서애 평가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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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 상신(류성룡)에 대하여 특별히 감회를 일으키는 이유가 있다. 요즈음 풍기(風氣)는 날로 얇아지고 인재(人才)는 갈수록 등급이 낮아져 나아가거나 물러나는 기거 동작이 모두 형식에만 얽매여 있다. 그런데 무릇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과 예의와 음악, 그리고 병사(兵事)와 농정(農政)에 대한 일을 가슴속에 잔뜩 쌓아 두었다가 상자를 거꾸로 하여 쏟아 내듯 하였으니, 고 상신 같은 분이 어떤 사람이었던가. 일찍이 그의 유집(遺集)을 가져다 보고 수집하여 실용(實用)에다 조처하려고 생각하였다. 서울과 가까운 경기 지역의 여러 고을에 군사 1만 명을 양성해야 한다는 설(說)은 장용영(壯勇營)의 새로운 제도와 은연중 합치가 되어, 장용영을 설치하고 시행하는 규모를 그 외 설에 의거하여 실시한 것이 많았다. 그리고 화성(華城)을 쌓을 때에 장수(丈數)를 계산하고 높낮이를 헤아리며, 토산물을 바치는 노정(路程)을 따져 보고, 모든 담장은 일제히 우뚝하게 하며, 종횡으로 교차되는 큰길을 모두 질서가 있게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쏟아 성(城)을 이룩하므로 역사(役事)를 권면하기 위해 치는 북소리가 감당하지 못하게 한 것도 고 상신이 남겨 준 계책에 많이 의뢰하지 않음이 없었다. 대저 자신이 당시에 기용되어서는 중신으로서의 계책이 명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고, 말을 후세에 전한 것으로는 헤아린 지략이 지금까지 국가에 이로움이 되고 있다. 산하(山河)는 예전과 같고 전형(典刑)은 멀지 않으며, 전해지는 운취와 남은 공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위연(喟然)히 감탄하면서 구원(九原)의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게 하니, 이것이 어찌 얕은 견해나 미미한 간언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겠는가. 전(傳)에 이르기를, “그 마룻대를 두터운 나무로 하지 않으면 무거움을 떠맡을 수 없다.”고 하니, 무겁기로는 국가만 한 것이 없고, 마룻대가 되기에는 재능만 한 것이 없다. 혹시라도 고 상신에게 부끄러운 기색이 없을 자, 아, 드물도다.
⇒ 홍재전서 제55권, 잡저(雜著) 2 ,문충공(文忠公,류성룡) 집안에 간직한 명나라 조정의 여러 장수들의 서화첩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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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의 흠을 찾아내려는 의논은 치우친 마음에서 나온 것(정조의 서애 평가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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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젊어서 퇴계에게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을 만나 전장의 급보가 빈번히 날아들고 공문서가 산처럼 쌓였는데 한편으로 답을 하고 한편으로 사람을 접하는 것이 모두 시의적절하였다. 신흠(申欽)은 상촌수기(象村手記)에서 “공은 내가 글씨를 빨리 쓴다고 하여 반드시 나에게 붓을 잡으라고 명하고 입으로 불러 문장을 만드는데, 줄줄이 이어지는 문서나 편지를 비바람 몰아치듯 신속히 만들어 내서 붓이 멈출 겨를이 없었지만 문장은 점 하나 더할 것 없이 완전하게 격을 이루었고, 주자문(奏咨文)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하였다.”라고 술회하였다. 이처럼 재능을 갖추고 이처럼 문장력을 지닌 사람은 가히 시대마다 있는 인물이 아니라고 하겠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의 하자를 찾아내려는 다소의 의논이 있더라도 그것은 치우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저 헐뜯는 사람들을 고(故) 상신(相臣)이 처한 시대에 처하게 하고 고 상신이 맡았던 일을 행하게 한다면 그런 무리는 백 명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고 상신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당하겠는가. 옛날 당 태종(唐太宗)이 이필(李泌)에 대해 말하기를, “이 사람의 정신은 몸보다 크다.”라고 하였는데 나도 서애에 대해서 또한 그렇게 말한다. 대개 그는 젊었을 때부터 이미 우뚝이 거인(巨人)의 뜻이 있었다. 처음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창설했을 때 사수(射手)와 살수(殺手)와 포수(砲手)를 설치하였고, 또 기내(畿內)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사 2만을 기르되 반은 서울에 두고 반은 둔전에 두게 하여 군사를 농민 속에 두는 뜻을 담으려고 했다. 계책은 비록 시행되지 않았지만 이처럼 좋은 경륜과 좋은 계책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오위(五衛)의 제도가 혁파되고 나서 국가에서 믿고서 급할 때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훈련도감의 군사뿐인데, 또 미리 양병(養兵)의 폐단을 생각하여 반농반병(半農半兵)의 설을 주장하였으니, 신기(神機)와 원려(遠慮)는 참으로 우리나라의 유후(留侯)인 것이다. 당시에 토지 제도를 정리할 수 없었는데 처음으로 절수법(折受法)을 만들어 세법이 정해지게 하여 지금에 이르러서 개척되지 않은 들이 없고 개간되지 않은 토지가 없게 되었으니 이것은 또 얼마나 큰 사업인가. 혹자는 절수법의 폐단을 가지고 서애에게 허물을 돌리기도 하지만 삼대(三代)의 정치도 더하거나 뺄 것이 있는데 하물며 말류의 폐단이 어찌 법의 죄이겠는가. 이런 경우는 지금 사람이 애당초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남의 선(善)을 가려서 자기의 기분만 후련하게 하려고 한 것이니, 참으로 제 분수를 헤아리지 못한 어리석음만 보인 것이다.
⇒ 홍재전서 제171권,일득록 11,인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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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공 류성룡 치제문(정조의 서애 평가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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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고 빛나는 이정38)이 / 煌煌彝鼎
태상에 있는데 / 太常則有 공적을 새겨서 기록하니 / 銘以紀之 문충 유공(柳公)이었네 / 曰文忠柳 저 석고39)와 / 與彼石鼓 기린각(麒麟閣)과 함께 / 曁厥麟閣 아름다움을 가지런히 하여 / 休美齊匹 백대에 이르도록 부서지지 않으리 / 百代不泐 선조조의 중흥은 / 宣廟中興 그 공이 실로 경에게 있으니 / 卿食其當 달려가 아뢰어 왜구의 칩임을 막고자 함이 / 奔奏禦侮 서쪽의 일방에 있었네 / 在西一方 책략을 내고 고삐를 잡음에 / 以籌以靮 그 마음과 힘을 극진히 하여 / 盡乃心力 임금의 행차 다시 돌아오고 / 龍馭載返 거센 파도 길이 그쳤네 / 鯨波永息 공훈은 진승40)에 드리우고 / 功垂晉乘 이름은 조려41)에 무거워 / 名重趙呂 모두들 서애를 칭송하니 / 咸誦西崖 농사짓는 지아비와 길쌈하는 아낙네들이네 / 農夫紅女 대대로 후손을 녹용(錄用)하여 / 世世錄後 작록을 세습하고 관인(官印)을 차게 했는데 / 襲爵佩紱 근래엔 유집을 열람하느라 / 近閱遺集 촛불을 밤늦도록 밝히곤 했었다네 / 筵燭屢跋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 最犂然者 성호의 방략인데 / 城壕方略 이때에 두 후손이 / 是時兩孫 금방에 나란히 이름이 걸렸네42) / 金牓聯擢 교목의 무성한 그늘에 / 喬木之蔭 한림(翰林)과 기랑이 배출되니 / 翰圈騎郞 기성(箕星)이 있어서 / 維星有箕 정광을 접하는 듯 / 若接精光 염매43)와 주즙44)에 / 鹽梅舟楫 문득 광세(曠世)의 감회를 일으켜 / 輒起曠想 교남으로 명을 달리게 하니 / 馳命嶠南 경이 내 잔을 흠향하기 바라네 / 予酌卿饗
⇒ 홍재전서 제23권 제문(祭文) 5
38) 이정(彝鼎) : 종묘(宗廟)의 제사에서 신주(神酒)를 따라 두는 제기의 이름이다. 옛날에 공로가 있는 신하의 이름을 여기에 새겨서 오래도록 전하게 하였다.(고전번역원 주해) 39) 석고(石鼓) : 북 모양의 큰 돌에 주 나라 선왕(宣王)이 기산(岐山)으로 사냥하러 간 일을 기려서 새긴 것이다.(고전번역원 주해) 40) 진승(晉乘) : 춘추 시대의 진(晉) 나라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여기서는 국사(國史)를 말한다. 41) 조려(趙呂) : 주 나라 종묘의 큰 종 이름이 대려(大呂)인데, 조려라고 한 것은 평원군(平原君)이 모수(毛遂)를 칭찬하면서 “모 선생이 한번 조 나라에 이르러 조 나라로 하여금 구정대려(九鼎大呂)보다 무겁게 하였다.”고 한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76 平原君虞卿列傳 平原君》 (고전번역원 주해) 42) 서애선생의 8대손 류상조와 류이좌가 동시에 급제한 것을 말한다. 류상조는 류이좌의 종형으로 후일 병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류이좌는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서애선생의 후손들은 영남 남인들이 야당으로 전락함에 따라 오랫동안 출세 길이 막혀 있다가 정조의 탕평책으로 인해 이 때 와서 비로소 등과한 것이다. 43) 염매(鹽梅) : 소금과 매실로 본디 국에 간을 맞추는 데 필요한 양념인데, 비유하여 왕정을 돕는 재상의 역할을 뜻한다. 은 나라 고종(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그대가 짐의 뜻을 가르쳐서 …… 만약 국에 간을 맞추려거든 그대는 염매가 되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書經 說命下》 (고전번역원 주해) 44) 주즙(舟楫) : 배와 노란 뜻으로, 왕정을 돕는 재상의 역할을 비유하는 말이다. 은 나라 고종이 부열을 발탁하여 재상의 일을 맡기고 자신을 가르쳐 주기를 당부하면서 “만약 큰 내를 건너고자 한다면 너로써 주즙을 삼을 것이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書經 說命上》 (고전번역원 주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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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문충이 말한 바가 곧 대동법(大同法)이었으니, 대동에 대한 논의는 문충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인가?(정약용의 서애 평가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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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신(相臣) 류성룡이 상소하여 공안을 상정하기를 청했는데 그의 논의에, “각 도의 민결(民結)에 쌀과 콩을 고르게 부과해서 모두 경창(京倉)으로 실어오도록 하고, 각사(各司)의 공물 및 방물 진상도 물품을 계산해서 값을 정합니다. 제용감에 진헌(進獻)하는 모시와 베의 값을 무명[木]으로 하는 예와 같이 하고, 유사(有司)를 시켜 무역해서 쓰도록 합니다. 군자(軍資)가 부족하거나 국가에 특별히 조달할 일이 생기면, 공물과 방물 진상의 액수를 요량해서 적당히 감합니다. 그렇게 하면 곳간에 갈무리한 쌀과 콩으로 번거롭게 바꿔서 만들지 않더라도 취해 쓰는 데에 다함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중국에는 외방에서 진상하는 일이 없고, 다만 13도(道)의 속은(贖銀 : 벌금으로 받은 은)을 광록시(光祿寺)에 교부(交付)하여 모든 진공(進供)하는 물품을 사서 쓴다 합니다. 만약 특별히 소용되는 일이 있으면 특명으로 선수(膳羞)를 줄여서 그 값을 인용(引用)하기 때문에 먼 지방 백성이 실어나르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공장에서 만든 온갖 물건이 경도에 모여들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것은 그 법 세운 것이 좋은 것입니다.” 하였다. 생각건대, 류문충(柳文忠 : 류성룡의 시호)이 말한 바가 곧 대동법(大同法)이었으니, 대동에 대한 논의는 문충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인가?45)
⇒ 경세유표 제11권 地官修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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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임란 도중에 ‘공물작미법’이라는 이름의 대동법을 최초로 시행했다는 사실은 북인과 서인들이 집권함으로써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정조 시대의 남인인 정약용 조차 뒤늦게야 사실을 알아내고 탄식한 것이다.
45) 서애선생이 일찌기 가지고 있었던 공납 개혁 의지는 임란 도중 ‘공물작미법’을 시행하는 것으로 구체화 되었다가, 기득권층의 반발로 지속되지 못하였는데, 200여년 후 다산 정약용이 이것이 최초로 시행된 대동법임을 발견하고 감탄한 내용이다. 조선 후기 대부분의 기간에는 당쟁의 여파로 서애선생의 업적 거론이 금기였기 때문에 정약용이 뒤늦게 알게 되었으며 경세유표에 기록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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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의 운필은 그 정채가 돌연히 사람의 눈을 쏘아대었다(정약용의 서애 평가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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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수운정(水雲亭)’이란 세 글자는 서애 류 문충공이 손수 쓴 필적(筆蹟)이다. 문충공이 세상의 지탄을 받게 되자 단양의 운암장(雲巖莊)에 은퇴하여 살면서 그 정자(亭子)에다 ‘수운정’이라고 현판(懸板)을 써 걸었는데, 이것이 그 진본(眞本)이다. 참판 오대익이 운암장을 구매(購買)한 다음, 문충공의 진적(眞蹟)이 아직까지 문미(門楣 문 위에 가로 댄 나무)에 있는 것을 보고서 ‘보물(寶物)이 될 만하다.’ 하고는 그 때와 먼지를 씻어낸 다음, 이를 표구(表具)하여 첩(帖)으로 만들었으니, 역시 좋은 일이다.
문충공의 경술(經術)이나 훈벌(勳閥)의 위대함은 일반 사람도 다 아는 것이지만, 서예(書藝)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운필(運筆)하여 획(畫)을 만든 것은 마치 서로 끌어당기는 철사줄이나 반듯하게 세워 놓은 돌처럼 곧고 힘차게 빼어나서, 그 정채(精采)가 돌연히 사람의 눈을 쏘아대었다. 아, 이 세 글자를 놓고 공(公)이 그 당시 대사(大事)에 임하여 대의(大議)를 처결한 자취를 더듬어 볼 때, 그 무언가 방불한 점이 있음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가 있다. 참으로 공은 위인(偉人)이었다.
⇒ 다산시문집14권,수운정첩(水雲亭帖)에 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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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축성에 류성룡의 ‘전수기의’가 유용(정약용의 류성룡 평가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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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기의》는 서애 류 문충공이 임진왜란 때에 찬술한 것이다. 임자년(1792, 정조 16) 겨울에 화성(수원)에 성역(城役 성을 쌓거나 축수하는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 마침 여묘(廬墓)살이를 하고 있었다. 상(上)이 연신(경연관)을 시켜서 국조(國朝)의 명신(名臣)으로 성(城)의 제도를 의논해 놓은 것이 있는가를 나에게 물어왔다. 그래서 신이 이 책(전수기의)과 모원의(茅元儀)의 무비지(武備志)에 기록된 윤경(尹耕)의 보루(堡壘)에 관한 설을 요약하여 대답하였는데, 이 말이 꽤 쓰여졌다. 수개월 뒤에 이 책을 다시 돌려주므로, 마침내 우리 집에 소장하게 되었다.내가 을묘년(1795, 정조 19) 봄에 병조참의로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고 화성에 가서 비로소 성의 제도를 보았는데, 문루의 앞뒤에 다섯 구멍을 뚫어 놓았으므로, 그 이름을 물어 보니 ‘오성지(五星池)’라고 하였다. ‘오성지’는 장차 물을 쏟아서 성문의 화재를 막기 위한 것인데, 구멍을 가로로 뚫어 놓았으니 이를 어디에 쓴단 말인가? 일을 맡은 신하가 그 겉을 보기좋게 꾸미는 데에만 힘쓰고 실용적인 것은 강구하지 않았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 다산시문집 14권, 전수기의(戰守機宜)에 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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