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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團法人

西厓先生記念事業會

고금의 서애평가

통제사 이순신은 류성룡에게 뇌물을 주고 아첨하여 자리를 보존하였다(후광세첩)
서애는 재상으로서는 드물게 이재(吏才)를 구비한 기재(상촌 신흠)
서애는 율곡의 10만 양병론에 반대하여 이산해로부터 핀잔을 들었다(은봉 안방준)
서애는 삼공의 지위에 있었으나 청빈하며 정치가 공평하고 밝았다(하담 김시양)
하늘이 공에게 책임을 내려주어 국가를 중흥시킨 것은 너무나 명백(동주 이민구)
백성이 지금까지 편안히 살고 생업에 종사하게 된 것은 모두 서애의 덕분(미수 허목)
징비록(懲毖錄)을 읽고 감회를 읊다(갈암 이현일)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류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가 없다.(회은 남학명)
우리나라 경세문은 서애가 제일(몽예 남극관)
우암 송시열이 선생의 시 ‘우영(偶詠)’을 제자 이희조에게 읊어 주다(송시열 어록)
서애 청백(성호 이익)
이순신은 서애가 맹세코 발탁하지 않았다면 개천에서 굶어 죽었을 것(성호 이익)
류성룡‧ 이항복 등은 당색이 달라도 사심 없이 힘을 합해 국가를 재건했다(창주 나학천)
“류성룡은 임란을 예견했으나, ‘이인좌의 난’은 류성룡 때문이라 한다”(영조)
서애는 무릇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과 예의와 음악, 그리고 병사(兵事)와 농정(農政)에 대한 일을 가슴속에 잔뜩 쌓아 두었다가 상자를 거꾸로 하여 쏟아 내 하였다. (정조의 서애 평가①)
서애의 흠을 찾아내려는 의논은 치우친 마음에서 나온 것(정조의 서애 평가②)
문충공 류성룡 치제문(정조의 서애 평가③)
류문충이 말한 바가 곧 대동법(大同法)이었으니, 대동에 대한 논의는 문충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인가?(정약용의 서애 평가①)
서애의 운필은 그 정채가 돌연히 사람의 눈을 쏘아대었다(정약용의 서애 평가②)
수원 화성 축성에 류성룡의 ‘전수기의’가 유용(정약용의 류성룡 평가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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