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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의 축성술은 진실로 절묘한 제도(정약용의 류성룡 평가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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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예부터 치에 대한 제도가 있었는데, 문충공(文忠公) 류성룡의 전수 기의(戰守機宜)에, 치가 없고는 성을 지킬 수 없으며, 포루(砲樓)가 있음으로 해서 얻는 이익이 크다는 것을 말했는데, 이제 진주(晉州) 병영(兵營)의 성에 포루를 많이 설치한 것도 역시 류성룡의 제도에 따른 것입니다. 대개 치의 머리가 성밖으로 불쑥 튀어나와서 성벽의 바깥 부분을 한눈에 살필 수 있고, 또 치와 치가 서로 마주 보고 있게 되어서 탄환이나 화살이 서로 미칠 수 있으므로 적병이 성벽 가까이 접근할 수 없어, 성 위의 타(垜 성가퀴 위에 있는 살받이)에 있는 군사들이 안전하고 여유있게 싸울 수가 있으니, 진실로 절묘한 제도입니다.
⇒ 다산시문집 10권, 포루도설(砲樓圖說) 적루(敵樓)ㆍ적대(敵臺)ㆍ포루(鋪樓)ㆍ노대(弩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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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이 아니었다면 조총의 제도마저 전해지지 못하였을 것(정약용의 류성룡 평가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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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당 관찰해야 할 것은 오직 기물(器物)의 정교함과 여러 가지 조련(調鍊)하는 법인데, 이 책에서는 그 점이 생략되었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이 그곳에 표류(漂流)하면 그들은 번번이 새로 배를 만들어서 돌려보냈는데, 그 배의 제도가 아주 절묘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도착하면 우리는 그것을 모두 부수어서 그 법을 본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관왜(館倭)의 방롱(房櫳) 제도도 아주 정결하고 밝고 따뜻해서 좋다. 그러나 그 법을 본받으려 하지 않으니, 그 법을 기록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난번에 류 문충(柳文忠, 문충은 류성룡의 시호)이 아니었더라면 조창(鳥鎗,조총)의 제도마저 끝내 우리에게 전해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 다산시문집 14권, 해사견문록(海槎見聞錄)에 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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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나는 대로 서애집과 징비록 등을 읽고 활용도록 하라(정약용의 서애선생 평가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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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가에 고려사ㆍ반계수록(磻溪隨錄)ㆍ서애집(西厓集)ㆍ징비록(懲毖錄)‧ 성호사설(星湖僿說)ㆍ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의 서적을 읽으면서 그 요점을 초록하는 일 또한 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우리나라 사람들은 걸핏하면 중국의 일을 인용하는데, 이 또한 비루한 품격이다. 모름지기 삼국사ㆍ고려사ㆍ국조보감(國朝寶鑑)ㆍ여지승람(輿地勝覽)ㆍ징비록(懲毖錄)ㆍ연려술(燃藜述)과 기타 우리나라의 문헌들을 취하여 그 사실을 채집하고 그 지방을 고찰해서 시에 넣어 사용한 뒤에라야 세상에 명성을 얻을 수 있고 후세에 남길 만한 작품이 될 것이다.
⇒ 다산시문집 제21권, 서(書), 연아(淵兒)에게 부침, 무진(1808, 순조 8년, 선생 47세) 겨울
--------------------------------------------------------------------- 연아는 다산 정약용의 딸이다. 정약용은 딸 연아 뿐만 아니라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다산시문집 제21권, 두 아들에게 부침)에서도 서애집과 백사집(이항복)‧ 오리집(이원
익)‧ 이충무공전서 등을 필독서로 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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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이 만든) 임진강 부교는 세계 최초의 현수교(‘호머 헐버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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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세계 최초로 현수교(suspension bridge)를 건설하였다. 다리라고 부를 수도
없는 안데스 산맥의 밧줄 다리를 제외하면 현수교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세계 최초의
다리는 1592년에 조선의 임진강에 세워졌다. 이 다리 역시 위기에 대처하는 긴박한
필요에서 나왔다. 평양에 있던 일본군은 지원군의 대패를 알게 되자 철수를 결정하였
다. 명나라가 조선 편에 서면서 중국과 조선의 연합군에 의해 평양에서 내몰린 일본
군은 서울을 향해 남쪽으로 서둘러 퇴각하였다. 그러나 연합군 추격대가 임진강에 다
다랐을 때 명나라 장수는 도강을 거부했다. 그는 조선이 명나라 군사 12만 명이 안전
하게 건널 수 있을 만큼 크고 튼튼한 다리를 놓아 주지 않으면 추격을 계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버틴 것이다. 조선은 일본에 대한 복수에 목말라했기에 그 어떠한 장애물도
조선인들의 도전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조선은 방방곡곡에 장정들을 보내 대량의
칡을 모았다. 조선의 칡은 거친 섬유질의 덩굴로, 조선에는 길이가 100야드 정도 되
는 칡도 흔하다. 조선 병사들은 칡을 꼬아 8개의 거대한 동아줄을 만들고, 그 동아줄
들을 이용하여 다리를 만들었다. 먼저 동아줄을 거대한 나무에 단단히 묶어 고정한
채 땅에 떨어뜨린다. 그리고는 다리를 전문으로 놓는 사람들이 나룻배로 동아줄을 강
건너편으로 날라 반대편 쪽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동아줄을 나무에 묶는다. 물론 동아
줄은 강 중간에서 물에 닿게 되지만 조선인들은 임기응변으로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감당한다. 단단한 참나무를 동아줄 사이에 끼워 넣고 수면에서 10피트 정도 간격이
생길 때 까지 동아줄을 비틀어 꼰다. 그런 다음 여덟 개의 평행한 동아줄 위에 나무
를 얹고, 그 위에 찰흙을 으깨 자갈을 깐다. 노반을 견고하게 다지고 다리의 안전 실
험을 마치자 명나라 장수는 더는 진격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2만 명의 명나
라 군사는 군용 장비를 메고 조선 군사와 함께 150야드 길이의 세계 최초 현수교를
걸어 안전하게 강을 건넜다. 거북선과 마찬가지로 이 현수교 또한 쓰임새를 다한 뒤,
제 하중에 무너질 때까지 방치되었다. 이상 다섯 가지 발명품(금속활자,거북선,현수교,폭발탄,한글)은 한국의 자랑거리인 동
시에 불명예이기도 하다. 이러한 위대한 발명품들은 한국인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발
휘되는 발명에 대한 잠재능력을 잘 말해주지만 한국인 들을 칭찬만 할 수는 없다. 한
국인들은 그토록 놀라운 발명의 성과를 이뤘지만, 그 성과를 더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위대한 발명품들을 사장시켜 버렸기 때문이다.46)
⇒ ‘호머 헐버트’ 박사의 ‘월간 하퍼스(Haper’s New Monthly Magazine’ 1899년 6월호 기고문인 ‘한국의 세계적 발명품(Korean Inventions)’
----------------------------------------------------------------------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는 미국 버몬트 주에서 대학 총
장이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대학 재학 중 조선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
영공원’의 교사가 되기 위해 1886년 조선으로 건너 왔다. 그는 한글 사용 주창과 더
불어 우리나라 역사서를 쓰고 아리랑 보급운동을 전개했다. 또 조선 근대 교육의 초
석을 놓았으며, 일제의 침략주의에 맞서 고종 황제의 밀사가 되거나 민권 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를 위해 온 몸을 불태웠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하여, 1949년 양화진의 한강변에 안장되었다.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다. 1899년 6월자 ‘월간 하퍼’지에 ‘한국의
세계적인 발명품’이라는 글을 기고한 뜻도, 한국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자는데 있
었다. 그는 웬만한 한국사 전공자보다도 더 한국역사에 해박했다. 그는 본문 외에도
칡으로 만든 밧줄을 꼬아서 팽팽하게 당기는 실감나는 모습의 삽화도 곁들였다. 현수
교의 제작 경위와 방법 등에 관한 내용은 징비록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다음은
징비록에 들어 있는 ‘임진강에 부교 놓은 일을 기록하다’(서애전서, 이재호 번역 징비
록 308-310쪽)의 내용이다
계사년(1593,선조 26) 정월에 명나라 군사가 평양을 공격하여 수복하였으며, 적병을 추격하여
서울 가까이에 오게 되었는데, 나는 군량을 독촉, 보급하는 일로 군대보다 앞서서 먼저 길을
떠나갔다. 이 때 임진강에는 얼음이 막 녹아 건널 수가 없으므로, 제독(이여송)은 잇달아 사람
을 보내어 부교(浮橋,배다리)를 만들 것을 독촉하였다.
나는 길을 가다가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하고는 금교역에 도착하니 황해도의 고을 수령들이 그
이속(吏屬)과 백성을 거느리고 명나라 대군을 영접하여 음식을 대접하려고 나왔는데, 사람들이
들판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우봉 현령 이희원을 불러 그 고을 백성 몇 백명을 거느리고서
밤을 새워 먼저 가서 칡덩굴을 가지고 임진강에 모여 있도록 약속시켰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나는 임진당 아래로 달려가서 내려다보니, 강의 얼음은 그대로 있는데도
날씨가 따뜻하여 얼음이 움푹 꺼져 있었다. 물이 얼음 위에 있는 것은 몇 자 뿐인데도, 강 너
비가 매우 넓었기 때문에, 경기 수사 이빈과 장단 부사 한덕원 등이 모두 도착하였으나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이빈이 태만하여서 사전에 준비하지 못한 책임을 추궁하여 곤장을 치고, 우봉 사람들을
불러 칡덩굴을 바치게 하여 모두 앞에다 쌓아두게 했으나, 여러 사람들은 이것으로 무엇을 하
려는지 알지 못하였다. 나는 그것을 꼬아서 큰 동아줄을 만들게 하니, 그 길이가 대략 강의
너비를 지나갈 만한 것이 15 다발이나 만들어졌다. 또 강의 남쪽과 북쪽의 언덕에다 땅을 파
고 두 기둥을 세워서, 서로 마주보게 하여 요동하지 못하게 하고, 나무 한 개를 눕혀 기둥 안
쪽에 두기를 베틀모양처럼 하고서는, 큰 동아줄을 팽팽하게 펴서 강을 지나가게 하고, 양쪽
끝은 기둥 안의 가로지른 나무에 매어 날줄을 만들었다. 그러나 강 너비가 너무 넓어서 동아
줄 중간이 절반쯤 물에 잠겨서 높이 쳐 들 수가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사
람들의 힘만 허비하게 할 뿐이니 다리가 어떻게 될 수 있겠는가”하였다. 나는 강가에 있는 군사 전원 1천여 명으로 하여금 각기 2-3척(尺)이 되는 짧은 막대기를 가지
고, 한 쪽 머리로 칡 동아줄 안을 가로로 뚫어서 힘껏 서너 바퀴를 돌려 이쪽저쪽에서 서로
버티어 당겨서 일으키니, 그제야 물에 잠긴 동아줄이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고, 나무
막대기가 빗살처럼 차례로 배열되며 강을 건너 펼쳐져서, 활 모양 비슷한 구부렁한 한 개의
다리가 엄연히 이루어 졌다. 그런 후에 가는 버드나무와 싸리나무, 갈대를 그 위에 섞어서 펴
고 흙을 덮으니, 명나라 군사들이 이를 보고 매우 기뻐하여 다리 위로 말을 달려 지나갔는데,
먼저 화포와 병기를 운반하고는 모두 뒤따라 이 다리로 건너갔다. 조금 후에 건너가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니, 다리의 동아줄이 끝내 늘어져서 다시 수면에 닿게 되었으므로, 많은 군대들은
얕은 여울을 따라 건너갔다.---
‘월간 하퍼스’는 1850년에 뉴욕에서 창간하였으며, 미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현존
하는 월간지이다. 문학‧정치‧문화‧예술‧재정 등에 대한 세계 주요 인사들의 글을 게재
하는 권위 있는 잡지로서, 19세기 영국의 대문호 디킨스, 영국의 수상 처칠, 미국의
대통령 윌슨도 기고한 잡지이다. 이 글은 한국의 세계적 발명품들을 국제사회에 소개
한 최초의 글로서, 당시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다. 주요 서적‧논문‧기고문을 전문적으
로 소개하는 영국 런던의 ‘Review of Review’라는 잡지는 ‘1899년 6월호 주요 글 소
개‘ 난에 ’발명의 나라 한국(Inventive Korea)’라는 제목으로 헐버트의 이 글을 소개
하였다.47)
이와 같은 헐버트의 노력 덕분인지 서애선생이 만든 현수교는 미국의 육사 교범과 일
본의 건축 관련 잡지에도 실렸다고 한다.
46) 이 번역문은 김동진 역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2016,참 좋은 친구)의 204쪽과 213-214쪽에 들어 있는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헐버트가 이와 같은 내용을 1899년 ‘하퍼’지에 기고했다는 사실은 민경배의 ‘글로벌 시대와 한국, 한국교회’(2011,대한기독교서회)의 173쪽에도 실려 있다. 47) 이 부분도 김동진 역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2016,참 좋은 친구)의 205쪽 ‘헐버트와 스테드’의 내용을 옮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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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선생은 종횡무진의 역량으로 나라를 구제하신 원훈이자 탁월한 정치가(이재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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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들이 과거 가열(苛㤠) 처참했던 임진국란을 극복했던 인물로서는, 그 당시 사전에 충무공 이순신 같은 명장을 추천 등용시켜 장래에 일어날 전란에 대비케 했으며, 또 전란이 일어나자 영의정과 도체찰사의 중책을 한 몸에 지고서, 민정‧ 군정‧ 외교에 종횡무진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전쟁을 승리로 종결시킨 서애 류성룡 선생을 감란 구국(戡亂救國)의 원훈(元勳)으로 일컫는 데에 이론이 있을 수 없다고 여겨진다.---
서애선생의 평생 업적을 필자가 외람히 논평한다면, 사업 면에서는 감란구국, 즉 전란을 평정하고 나라를 구제하신 탁월한 정치가이시고, 학문 면에서는 명체적용(明體適用), 즉 사물의 본체에 밝고 작용에 적응하신 진정한 학자이시다고 할 수 있다
⇒ 이재호, ‘류서애의 역사의식과 시국대처의 자세‧ 방책’(2005, 서애 류성룡의 경세사상과 구국정책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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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그는 제갈공명도 다스릴 수 없었을 난세에 중책을 맡고 신음하던 정치가(최영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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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선생은 정치가로서만이 아니라 전략가로서도 뛰어났다. 난중에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비롯한 여러 병서를 연구하여 군의 명령 계통을 단일화하고 군대 훈련을 위하여 새로이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연병규식(練兵規式)을 반포하였으며, 조총을 위시한 화기류를 연구하여 이를 제조케 하였다. 또 성곽을 연구하고 지세를 살피어 남한산성을 비롯한 여러 산성을 수축케 하고 조령에 둔전을 개척하여 충주의 방어를 엄중히 하게 하였는데 이는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후세에 대비한 원대한 계획이었다. ---
선생은 군량의 일부를 풀어 기민(飢民,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고 유리(流離,떠돌이 백성)하고 있는 국민을 농토로 돌아가 경작케 하였으며, 난중에도 염철(鹽鐵)의 생산을 장려하여 경제 재건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을 격퇴하고 임진왜란을 승리의 길로 이끌기 위한 가장 큰 과제는 흩어진 민심을 재수습하고 국민을 단결케 하는 일이었다. 선생은 “국가를 유지하게 하는 것은 인심뿐이고 비록 국가가 위태로울 때라 하여도 인심이 굳게 뭉치면 국가가 편안하고 인심이 흩어지면 국가가 위태로운 것으로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고 하며, 흩어진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먼저 재상을 비롯한 정부 요인이 국민의 모범이 될 것을 주장하여 관기(官紀)를 엄히 하고 법을 위반하는 자는 무거운 형률로 다스리게 하였다. 또한 선생은 함경도 수복 지역에 대한 정책을 논하면서 “정치는 관대함과 엄한 양면을 적당히 병용하여야 하며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난리 후 백성들이 흩어져 유리하는 시기에는 국민을 위로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재생의 의욕을 갖게 하여야 한다. 이리하여 국가의 근본이 동요될 근심이 없어진 후에야만 기타 여러 일을 점차로 시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비단 수복지역에 대한 정책일 뿐만 아니라 그 후 선생의 정책의 골자가 된 것이었다.--- 임진왜란 도중에 선조는 자신의 덕이 부족함을 한탄하고 사위(辭位,사퇴)의 뜻을 나타낸 일이 있었다. 이 때 선생은 자기의 무능으로 국사가 이에 이르렀으므로 마땅히 자기가 죄를 받아야 한다고 하자 선조는 “제갈공명도 한실(漢室,한나라 왕실)을 부흥할 수 없었다”하고 도리어 그를 위로하였다. 확실히 그는 제갈공명도 다스릴 수 없었을 난세에 중책을 맡고 신음하던 정치가였다.
⇒ 최영희 국사편찬위원장, ‘류서애선생전’(柳西厓先生傳,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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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의 유저는 민족 존망의 위급을 능히 이겨낸 슬기로운 극복사(허선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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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의 유저를 진정 올바르고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임진왜란은 오늘날 우리에게 전전(戰前) 대비의 소홀, 전국의 패배, 민생의 암담, 피해의 참혹 등으로 점철되는 이른바 민족 수난의 생생한 교훈사로서만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민족 존망의 위급을 능히 이겨 낸 슬기로운 극복사로서 천명, 전승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서애의 유저에는 민족 수난의 참상과 함께 이를 극복한 예지와 구체적 시책이 여러 모에서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애가 당시에 있어서 밖으로 명나라와의 협조 관계를 유지하면서 안으로 군국(軍國)의 모든 시정을 마련하고 추진하였던[外接天將 內籌軍旅] 넓고도 치밀한 현실 정치에 있어서의 가모(嘉謨)와 대유(大猷)와 실천이었다. 또한 그것은 성급한 결론일는지 몰라도 어디까지나 군사적 안목과 민심 안정을 바탕으로 하여 끝까지 국가의 중흥을 확신하고, 회피가 아닌 전진적 자세로써 일관함을 근저로 하는 것이었다고 필자는 이해하고 있다.
⇒ 허선도, 고전번역원 국역 서애집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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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선생에 있어서 진리는 인간을 초월한 별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송긍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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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선생 사상의 기본은 ‘채용겸전(體用兼全)’입니다.48) 체용겸전의 의미는 결국 이론도 중요하고 실천도 중요한 여기에 완전함이 달성될 수 있다는 논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서애 선생께서 획기적 정책을 수행하였고 또 과감히 헌책(獻策)하였습니다. 그 일례만 보더라도 광취인재계(廣取人材啓)49)라든지 신분타파의 주장, 군진포열(軍陣包列)의 이론,새로운 무기의 고안 및 제조시설의 급조 등 실로 실무자를 능가하는 지휘, 그것은 결국 이론과 실천을 겸전(兼全)한 학문적 조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믿어 마지않습니다. 그 다음으로 말씀드려야 할 것은 서애선생에 있어서 진리는 인간을 초월한 별(別)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경험할 수 없고 또 체험할 수 없는 그러한 곳에 진리를 구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 참된 것이 있고 진리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상생활 가운데서 진리를 탐구하는 그러한 학자인 것입니다.
⇒ 송긍섭, ‘서애선생의 기본 사상’(1978)
48) 이론 또는 목표와, 그것을 실천‧달성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 및 능력을 함께 갖추어야 완전하다는 말임. 49) 신분 계급이나 문벌 도는 지역 등에 구애 없이 능력에 따라 필요한 인재를 널리 취해야 한다는 서애선생의 상소를 말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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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의 시책은 실학파의 개혁안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새로이 평가되어야(이수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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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증유의 대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배경을 고찰해 볼 때 그것은 논자에 따라 각기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그러한 임란 극복의 원인으로 해전의 승리라든지, 의병의 활동이라든지 또는 명의 구원이라든지 하는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며, 혹은 그러한 요인이 따로 작용했다기 보다는 서로 복합적인 작용에 의했다고 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 궁극적인 원인이 민심수습에 있었다고 본다. 류성룡이 임란 극복의 주역을 담당했다면 그것은 바로 민심을 수습하여 국가의 인적, 물적 자원을 전수(戰守)양면에 투입하는데 그의 사회경제적인 시책과 개혁안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왜적이 상륙한 지 1개월이 못되어 경성이 함락되고 선조가 의주까지 파천하면서 전국이 거의 적의 유린 하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정자의 임무는 우선 이산되고 동요된 민심을 수습해야 했던 것이며, 그의 사회경제적인 시책은 바로 이러한 면에 집중적으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기에 수군이 해상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의병들이 도처에서 봉기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명의 원군도 맞이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류성룡을 임란극복에 제1의 공로자로 평가하는데 충분하다고 본다.
한편 그는 청렴 강직한 학풍을 지닌 재지사족의 가문에서 생장하였고 경사(經史)와 문리(文吏)를 겸비한 정치가 겸 경세학자였다. 그는 정통 성리학에 훈도(薰陶)되었으며 체용겸전의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였다. 그의 사회경제관이 대개 해이해진 조선왕조의 봉건체제를 재정비 강화하는데 그리고 위급한 임진왜란의 응급책에 기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재정비의 응급책이 아니라 보다 전진적인 자세에서 당시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하겠다는 방향에서 제시되었던 것이다.
그의 사회경제시책 가운데 공물작미법(貢物作米法, 대동법)이라든지, 염철유통의(鹽鐵流通議), 중강개시(中江開市), 둔전설보책(屯田設堡策)과 신분을 초월한 인재등용책 및 천예편군책(賤隸編軍策) 등은 조선후기실학파의 개혁안과 일맥상통하다는 데서 새로이 평가되어야 한다. 즉 류성룡은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진보적인 경세학자로서 위로는 퇴계를 계승하고 아래로는 실학파를 연결하는 교량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본다.
⇒ 이수건, ‘서애 류성룡의 사회경제관’(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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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가 국난 극복을 위해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국민의 힘’의 활용이었으며, 이순신과 함께 국민 지도자의 처지에서 ‘망신순국(亡身殉國)의 정신을 발휘(이재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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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가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극복함에 있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국민의 힘의 활용이었으니, 이 국민의 힘을 활용하는 데는 먼저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그들의 생활을 돌보아 주는데 있었다.
이런 이유로써 전란이 일어난 그 이듬해에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여 굶어죽는 사람이 잇달아 일어나므로, 서애는 군량의 남은 곡식을 내어서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해 주고, 또 전쟁에 종사하는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그들의 공로를 장부에 낱낱이 손수 기록하여 뒷날의 논공행상의 증빙자료로 삼기도 하였다.
서애가 개성에서 국난타개의 방책을 국왕에게 진언할 적에 왜적을 물리치고 국토를 수복할 희망을 지방민중의 용사인 의병(義兵)에게 건 것은, 우리민족이 문화민족으로서의 유구한 전통과 유교정치의 절의숭상 정신을 그들 개개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음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즉 임란초기에 일어났던 각 지방 의병장들의 토왜(討倭) 격문을 살펴본다면, 한 결 같이 의관문물을 갖춘 우리 문화민족이 염치습속(染齒習俗)을 가진 오랑캐인 왜적에게 어찌 굴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비록 무기의 우열과 군병의 강약은 있을지라도, 국민상하에 충만된 적개심,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 즉 정신력의 우세로서 왜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결의를 표명하고 있었다. 서애는 이 때 국민의 지도자적 처지에서 국민의 잠재력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했기 때문에, 민중의 적개심에 호소하여 침략군을 물리치기로 국난극복의 방침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 위에 국민의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국민을 선도할 수 있는 망신순국(亡身殉國)50)의 정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즉 선조가 평양을 떠나 앞으로 갈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조신들은 자기 가족들의 신변을 염려하여 북도(함경도)의 안전지역으로 피란가려고 했다. 그러나 서애는 현재의 사세로서는 서쪽(평안도)로 가서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일이 국가의 대계이므로, 자신은 국가의 대계 때문에 노모의 안전을 위하여 북도로 피란 가는 사사(私事)를 돌볼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이 일은 저 충무공 이순신이 정유재란 당시 명량해협에서 열세의 병력으로 왜적의 대군과 결전할 적에 국왕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서 “지금 우리에게 전선 12척이 아직 남아 있으니 제가 죽지 않는다면 적군이 감히 우리를 깔볼 수 없을 것입니다”라는, 즉 자기 한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겠다는 결심 표명과 같이, 이 모두가 국민의 지도자적 처지에서 망신순국(亡身殉國)의 정신을 발휘한 것이었다. 우리는 서애 류성룡과 충무공 이순신 두 위인이 모두 국민의 지도자로서의 탁월한 지략과 망신순국적인 숭고한 정신을 가졌기 때문에 임진왜란이라는 가열(苛烈, 사납고 세찬)한 전란을 처리하고 일찍이 없었던 국난을 극복했음을 확신하는 바이다
⇒ 이재호,‘임진왜란과 류서애의 자주국방책’(1987.4,9-10일, 미국 버클리대 한국학연구소 주최 임진왜란 주제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
50)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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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는 전통적인 문벌과 신분을 떠나 능력을 위주로 인재를 선발(김호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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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신분제하에서 인재등용의 형상은 대체로 문벌들이 관직을 독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한미한 가문 출신자는 과거에 급제하였더라도 대부분 미관말직에 머물고 있었다. 이러한 문벌위주 인사는 재능 보다는 장기근속을 중심으로 하는 승진현상을 초래하여 여러 가지 모순을 야기 시켰다. 서애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재등용에 있어서 문벌과 지벌 등을 따지지 않고 오직 실재(實才)만을 구하고자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특히 서북지방 사람들을 많이 채용하여 지벌을 타파하는데 관심을 보였다. ---실재 등용의 중요한 몇 가지 사례를 든다면, 종 6품의 정읍현감인 이순신을 6단계를 뛰어넘어 정3품 당상관인 전라좌수사로 초수(超授)하게 하였다. 당시 사간원은 이를 가리켜 관직의 위계질서를 흩트리는 처사라고 국왕에게 취소하도록 간하였으나 그대로 등용되었으며, 권율도 정5품인 형조정랑에서 4단계를 뛰어넘어 정3품인 의주목사로 발탁하였다. 다음에는 신충원을 들 수 있으니 그는 서애가 선발한 실재의 대표적 사례 중의 하나이다. 신충원은 현직에 있는 관리도 아니고 문벌이 있는 가문의 자제도 아니다. 오직 민병과 승군, 그리고 공사천인 등을 모아 군공을 세워 수문장이 되었다. 조령 근처 사람으로 그 일대의 지세와 곡절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므로 조령방어에 필수적이었다. 그리하여 서애는 그를 절제사란 고위직책으로 승진시키고 조령에 둔전을 설치하도록 하여 관문의 방비를 철저하게 하였다.
⇒ 김호종, ‘서애 류성룡의 정치사상(1995, 한국의 철학 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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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과 이순신의 만남은 모든 시대를 뛰어 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만남(송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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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과 이순신, 임진왜란 7년은 이 두 인물을 역사의 인물로 만들었다. 이 두 인물의 하이라이트는 임진왜란이었다. 이 하이라이트에서의 두 인물의 만남, 그것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만남이었다. 만일 이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날의 우리가 어떤 우리로 존재했을까. 아마도 ‘한민족의 우리’가 아닌 ‘중국화 된 우리’ 혹은 ‘일본화 된 우리’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류성룡과 이순신, 그래서 그 만남은 조선으로서는 숙명이었고 모든 시대를 뛰어넘는 가장 위대한 만남이었다. 류성룡이 없는 이순신이 있을 수 없고 이순신을 생각지 않은 류성룡이 있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만남이야 말로 조선으로서는 행운이었다. 율곡의 말대로 기국비기국(其國非其國)- 나라가 나라가 아니었어도, 인물은 있었다. 인물이 있어 인물을 알아보았기에 사직은 이민족이 아닌 제 민족으로 유지되어 갈 수 있었다.
확실히 류성룡은 조선조 500년을 대표하고도 남음이 있는 정치리더십의 소유자였다. 그는 걸출한 정치인은 아니었다. 특출했다. 그는 강직한 정치인도 아니었다. 온유했다. 그 따뜻하고 부드러움으로 그 횡포한 명군 장수들을 꺾었다. 부드러움이 굳은 것을 제압하는 유능제강(柔能制剛)의 리더였다. 그는 최고의 권좌에 있으면서도 권력을 이념화 하지도 가치화 하지도 않았다. 대신 실용화 했다. 정치 리더로서는 권력의지가 아주 약했다. 자꾸 물러나려고만 했다. 그것이 정치 리더로서는 결함이었다.
⇒ 송복,서애 류성룡, 위대한 만남(2007 지식마당)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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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의 정치 논리의 토대는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이다(정만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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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연의(大學衍義)’51)를 강조하는 여느 정치과들과 달리 서애의 정치 논리는 그 토대를 ‘서경(書經)’의 ‘홍범(洪範)’52)에 두었다. 그는 홍범의 전 구절을 암송하였고 작고하기 하루 전날도 일어나 앉아 홍범의 끝 편을 외웠다고 할 정도였다. 홍범에 대해서는 한유(韓愈)의 훈고학적 접근이 있지만, 주자(朱子)가 황극(皇極)53)을 대중(大中)으로 보지 않고 ‘임금의 표준’으로 해석하면서 임금의 수신입도(修身入道)를 밝힌 학문이라 한 이래 수신군주론(修身君主論)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를테면 ‘군주유도(君主有道)’54)를 실현하는 심법(心法)인 셈이다. 특히 홍범 제5조의 황극설(皇極說)은 시비 변별의 최고 기준을 임금에게 귀속시키고 있어 ‘도고우군(道高于君)’55)을 내세워 신자(臣子)와 사림의 공론을 우선하는 정치론과는 구별된다.
서애가 이런 홍범을 작고할 때까지 암송하였다는 것은 그의 정치론이 홍범에 토대하고 있음을, 다시 말해 공론(公論)이 붕당간의 시비논쟁이 아닌 임금의 공평무사한 표준에 의해 정해진다는 논리에 있음을 말해준다. 그를 계승한 남인세력이 후일 예송이 일었을 때, 존군비신론(尊君卑臣論)의 견지에 서서 ‘왕자사부부동례(王者士夫不同禮)’를 주장하였던 것은 이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찾을 것이다.
⇒ 정만조, ‘서애 류성룡의 정치활동과 정치론’(2007, ‘류성룡의 학술과 경륜’ ,태학사)
51) 조선시대에 간행한 송나라 진덕수의 ‘대학’ 주석서 52) 세상의 큰 규범이라는 뜻 53) 임금이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 정한 대도(大道)로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의 도, 곧 요순이래로 전해오는 대법(大法) --- 한국고전용어사전 54) 임금이 도(道)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55) ‘도(道)가 임금보다 높다’는 정치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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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실각의 비밀과 해답은 신분타파책 등 개혁입법에 있다(이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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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류성룡의 인생에는 몇 가지 수수께끼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석연치 않은 점은 전쟁이 끝나는 시점에서 그가 실각한 이유다.---대동법은 임란 때 류성룡이 작미법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시행한 제도다---류성룡은 임란 때 속오군을 만들어 양반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지웠다. 그뿐 아니라 천민들도 종군을 조건으로 면천해주고 나아가 공을 세우면 벼슬을 주는 신분 타파책을 실시했다.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신분적 특권을 침해하는 이런 정책들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심지어 류성룡이 창안한 훈련도감에서 훈련 중인 노비들을 주인들이 데려가는 행태까지 보였다. 나라는 망해도 사대부들의 계급적 특권은 침해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바로 여기에 류성룡 실각을 둘러싼 의문의 해답이 있다. 류성룡의 이런 전시(戰時) 정책에 큰 불만을 갖고 있던 양반사대부들이 선조와 공모해 류성룡을 실각시킨 것이다. 그가 실각한 후 각종 개혁입법들이 무효화되었음은 물론이다.
전란 극복을 위해 자신이 속한 계급의 신분적 특권까지 타파했고, 결국 그 때문에 불행한 종말을 맞이한 류성룡, 그의 인생을 기존 당파나 양반 사대부들의 시각이 아니라 역사의 보편적 시각으로 되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인생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또한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 이덕일,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2007 역사의 아침)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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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의 학문은 실용에 모자람이 없도록 치밀했다(이장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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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의 학문은 그의 호한한 저술에서 알 수 있듯이 그 폭이 매우 넓다. 시문‧ 경사(經史)‧ 도학‧ 의례‧ 군사‧ 의학에 이르기까지 해박했으며, 실천을 중시했다. 경세제민의 방안을 강구하는 한편 예악‧ 교화에 관심을 가졌다.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응용하여 군사조련에 활용했고, 양명학과 불교에도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특히 지행합일과 체용(體用)을 중시한 그의 학문적 경향은 양명학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짙다.
⇒ 이장희, 서애 류성룡의 생애와 학맥(2007, 서애 류성룡, 구국의 지도력’, 서애선생 서세 400주년 추모사업 준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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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는 임란 후 반대당파의 계속 집권으로 폄하된 명재상(이수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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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중의 위기관리내각을 리드하는 입장에서 서애의 일거일동은 늘 반대 당인들의 비판과 공격의 대상이었다. 예컨대 임진왜란의 종전 무렵 북인들로부터 “주화오국(主和誤國), 즉 왜국과 화평을 주도하여 나라를 그르쳤다는 집중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강화를 추진하던 명‧왜의 막후 협상에 제동을 걸고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서애는 목소리만 높은 무모한 명분론자가 아니라 실질적 국가 이익의 확보를 중시한 현실론자였다.
그런데 서애의 하야 이후 당쟁 격화로 관찬 사서의 인물 논평은 자당을 옹호하고 타당을 공격하는 당돌벌이(黨同伐異)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서애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기존 자료에 대한 정확한 고찰 없이는 어렵다. 임란 이후의 정권이 북인-서인-노론으로 이어지면서 그들은 반대당파인 남인쪽 인물을 정적(政敵)의 위치에 두고 왜곡했다. 그들은 서애를 동‧서분당의 장본인으로 폄하했다. 그 때문에 서애문집과 ‘징비록’은 한말에 이르기까지 기호지방에서 거의 외면을 당했다.
⇒ 이수건, 서애 류성룡의 경세론과 처세학(2007, 서애 류성룡, 구국의 지도력’, 서애선생 서세 400주년 추모사업 준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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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의 위기관리 리더십은 오늘의 남‧ 북 지도자도 따라 배워야 한다(김호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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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증유의 국난을 부드러운 정치력으로 극복한 명재상 서애 류성룡, 민심수습과 정권안정을 구국의 요체로 파악한 식견, ‘조선으로 조선을 방위할 수 있다’는 자주국방 의지, 배고픈 백성들에게서는 충성심을 기대할 수 없다는 민생 중시 실용주의 국가경영철학, 그의 위기관리학은 오늘의 남‧ 북 지도자도 따라 배워야 한다.
⇒ 김호종, 난세의 위기관리학(2007,‘서애 류성룡, 구국의 지도력’, 서애선생 서세 400주년 추모사업 준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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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선 없는 절충의 리더십, 400년 후 오늘에도 거울(김호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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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이 10만 양병을 주장했을 리가 없지만, 주장했다면 오활한 주장이며, 현실적이고 치밀한 서애로서는 마땅히 반대할만할 일이다(이성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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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3년(선조 16) 4월에 율곡이 경연에서 10만 양병을 주장했는데 서애가 반대했다는 설이 있다. 이 기록은 율곡과 서애의 상소나 차자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1814년(순조 14)에 간행된 ‘율곡전서’의 김장생이 쓴 행장과 서인 이식 등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에만 보인다. 후세에 윤색된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혹 그런 제안을 했다고 하더라도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고 군정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당시에는 소란스럽기만 하지 성사될 가망성이 없다. 10만 양병은 조선시대 양병의 하나의 슬로건에 불과했다. ‘호왈십만(號曰十萬)’일 뿐이다. 한국은 농업국가로서 적당치 않은 나라이다. 국가의 2/3가 산이요, 따라서 농토가 얼마 되지 않는다. 늘 가물다가 7-8월에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홍수가 지면 농사를 잡치기 일쑤다. 그래서 만성적인 흉년과 기근에 허덕인다. 춘궁기에는 더욱 어렵다. 놀고먹는 군사를 기를 재원이 없다. 인구도 얼마 되지 않는다. 읍지(邑誌)에는 200만으로 나오고 아무리 늘려 잡아도 500만 미만이다. 이 중 절반은 여자요, 장정의 절반은 군대 안가는 천인이며, 각종 직역인(職役人)은 다 빠진다. 15세 이하, 60세 이상도 제외된다. 병자와 불구자, 도망자도 제외된다. 그러면 10만을 양성하기 어렵다. 무리하게 강군을 기르면 사회가 소란해지고, 반란이 일어날 수 있다. 병농일치의 부병제(府兵制)를 채택한 것도 직업군인을 기르면 쿠데타가 일어나 문치주의 국가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서이다. 군사를 기르려면 인구도 더 있어야 하고, 상업을 장려하거나 왜구와 같이 해적을 양성해야 한다. 따라서 문치주의 국가인 조선에서 강병을 양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체제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10만 양병설은 허황된 구호에 불과하다. 북벌론에서 말하는 10만 양병도 얼마나 허구이고 과도한 명분주의인가를 알아야 한다. 10만을 길러 200만의 청나라 군대와 싸운다는 말인가? 이것은 왕권 강화를 노린 효종과 노론집권의 명분을 축적하려는 송시열의 동상이몽 구호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율곡이 그때의 상황으로서 10만 양병을 주장했을 리 없고, 주장했다면 과연 오활한 주장이며, 현실적이고 치밀한 서애로서는 마땅히 반대할만한 일이다. 이것이 문치주의 정권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 이성무56), ‘서애 류성룡의 생애와 사상’(2008년 태학사, ‘임진왜란과 류성룡’ 149-150쪽)
56) 전 국사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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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한 순간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떨치지 않았던 휴머니스트(김학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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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16세기 조선이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치열한 자기 성찰과 노력을 바탕으로 한 시대가 주목하는 학자‧ 관료로서의 위업을 달성한 우뚝한 인간이었다. 그는 66년을 사는 동안 한 순간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떨치지 않았던 휴머니스트였고, 어떤 다급한 상황에서도 국가‧사회라는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했던 믿음직한 양신이었다.
인간애와 공익은 아무나 실천한 것이 아니고 또 아무에게나 그런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류성룡이 희생과 봉사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하며 동시대 조선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잘 가꾸어진 인성에 양질의 교육이 보태어졌기 때문이었다. 옥연정사에서 후세의 귀감을 삼기 위해 징비록의 저술에 들어갔을 때 여전히 그는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염려하는 충신이었고, 봄날 어머니를 모시고 바로 그곳에서 꽃구경을 하며 편안한 미소를 짓는 순간 그는 천생 효자였던 것이다.
⇒ 김학수, ‘류성룡의 치가의 리더십’(고전 사계 2015년 통권 17호 기획기사, ‘서애 류성룡 난세를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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