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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기록들의 원형은 예외 없이 과거지향성이다. 역사기록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의 실학도 지향하는 전범(典範)은 모두 과거에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글을 읽어 보면 새로운 미래 추구는 없다.---20세기에 와서 쓴 황현의 매천야록도 박은식의 한국통사, 조선독립지혈사도 모두 과거지향적이다. 한결같이 일본의 무신함, 일본에 대한 적개심, 우리 조정의 적폐와 조정 대신들의 무능, 매국행위만 따지고 파헤쳤을 뿐, 도대체 이 나라를 어디로 어떻게 무엇을 지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의 미래지향이 없다.---17세기 초(인조) 정묘-병자 호란을 겪고도 명나라 망한 것만 원통해 하고 절통해 하며 분개심만 드러냈지, 정작 100만도 안 되는,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인구의 여진이 어떻게 1억 5천 만 명의 명나라를 점유할 수 있었는지, 그러고도 그 긴긴 세월을 지배할 수 있었는지, 기이하게도 질문이 없고 의문이 없다. 오로지 과거를 향해 중화문물만 받들고 높일 뿐, 한갓 작은 부족일 따름인 여진족이 세운 대청(大淸)제국이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제국이 된 그 원인 그 경위를 알려고 안했다. 이미 역사 이전으로 사라지고 없는 그 옛날 한족이 세운 명(明)만을 그리워하며 ‘만절필동(萬折必東)’의 만동묘(萬東廟)나 세워 19세기 중반이 넘어서도록 까지 ‘한족 중국문화’의 계승자로 자처하는 망상을 멈추지 못했다. 그토록 과거지향적이었다.
그러나 ‘징비록’은 처음 시작부터 달랐다. ‘징비(懲毖)’라는 어휘 자체가 당시에는 없던 말이다. 단순히 글자 그대로만 보면 ‘징비’는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 나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는 시경(時經) 한 구절에 나오는 글자들이다. ‘징비’는 이 시경 구절의 앞뒤 한 글자씩을 따서 류성룡이 직접 새로이 만든 조어(造語)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쓰던 한자어를 모아 만든 ‘한국한자어사전’에는 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사전에 주제어로서 없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전혀 쓰지 않던 말이라는 의미다. ‘징비’는 그 때 사람들의 지적 수준에 비추어 류성룡이 아니면 도저히 만들 수 없는 기막힌 조어(造語)다.---류성룡 징비록에서 징비의 주체는 철저히 ‘나’다. --- 모든 잘못이 ‘나’에게 있다고 하면, ‘나’는 반성한다는 것이고, 다시는 그런 과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경계한다는 것이고, 끊임없이 새 방책을 강구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새로운 미래를 열어간다는 것이다.---징비록의 ‘징비’ 정신은 미래지향의 원형(原形)이다. 어떻게 그런 시대 그런 원형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류성룡의 삶과 그의 마지막 저작 징비록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희망이다. 징비록의 ‘징비’에 더 깊은 함의는 천찬(天贊)이다. 천찬은 바로 희망이다. 그것은 하늘이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그 하늘의 도움을 ‘절대 확신하는’ 희망이다. 임진왜란은 절대절망(絶對絶望)의 극한상황이다. 절망의 맨 끝, 도저히 헤어날 수도 일어설 수도 없는, 인력으로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앞이 막힌 상태, 그것이 절대절망이다. 그 절망의 극단에서도 절망은 없었다. 절통(切痛)해도 절망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징비록의 기록이고 ‘징비’의 또 다른 함의다. 그 희망이 소생(蘇生)의 원천이고, 국가재조(國家再造), 나라를 다시 만들고 일으키는 힘이었다. 그 희망이 과거를 털고 미래로 향하는 비로 미래지향성이었다. 어째서 류성룡은 절망하지 않았는가. 절망 말고는 아무것도 품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다른 조신들과 달리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까. 아니, 희망을 굳게 믿고 흔들림이 없었을까. ‘징비록’에서 그 두 가지를 찾아낼 수 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찾을 수 있지만, 이는 모두 파생적(派生的)인 것이고 근본적인 것, 대본(大本)이 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류성룡의 유교적 신념이고, 다른 하나는 이순신이다. 바로 류성룡이 그에게 건 유일한 희망이다. 앞의 것이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라면, 뒤의 것은 임진왜란을 맞으면서다.
⇒ 송복, ‘류성룡의 시관’(2019년, 법문사, ‘서애 류성룡의 리더십’ 44-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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