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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한유와 장자를 읽고 문리를 터득하여 독보적 존재가 되었다(만전당 홍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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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홍가신) 나이 십육칠 세 때부터 공(류성룡)과 더불어 놀고 과거 공부를 할 적에 낮이면 탑(榻,책걸상)을 연하고 밤이면 같은 이불속에서 잤었다. 공은 얼굴빛이 부드럽고 기운은 호방하여 때때로 해학(諧謔,유모어)을 좋아해서 수렴(收斂)하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내 매양 공의 말하는 것이 사람을 놀래는 것을 보고 스스로 탄식하여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어느 날 공이 나를 와서 보고 말하기를 “내(류성룡) 수일 전에 한문(韓文, 한유)의 원도(原道)와 장자의 추수편(秋水篇)을 두어 번 읽었더니 문사(文思)가 돈연(頓然)히 진보함을 깨닫겠노라”하고 인하여 공이 지은 한 책문(策文)을 내보이는데, 파란(波瀾)이 호호(浩浩)하고 광채(光彩)가 괄목할만 해서 전날에 보던 문자(文字)가 아니었다. 이로부터 시부(詩賦)와 논책(論策)이 모두 일시의 과거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 독보(獨步)가 되었더니---
⇒ 만전당집 5권, 후서, ‘류서애 이현(而見 류성룡의 자)의 행적을 대략 기록함’
---------------------------------------------------------------------- 위는 서애 선생의 소년 시절 친구인 만전당 홍가신의 글이다. 홍가신이 한 살 많았으니 이 기록에 따른다면 선생의 15-6세 때 이야기인 것이다. 선생은 6세 때에 재종조부 파산 류공석으로 부터 ‘대학’을 배웠고 8세 때는 ‘맹자’를 읽었으며, 13세 때에는 서울의 동학에서 ‘중용’과 ‘대학’을 강독할 수준에 이르렀지만, 15-6세 때에 읽은 “한유의 ‘원도(原道)’와 장자의 ‘추수편(秋水篇)’을 두어 번 읽고서 문사(文思)2)가 갑자기 진보함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 두 가지의 글은 종래의 이름 난 유교 경전이 아니라는 것에서 의미가 있으며, 장자는 당시 금단의 대상이었던 도가의 사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선생이 이러한 상반된 글들을 읽은 시기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사상과 인격의 기초가 형성되는 사춘기여서 어떤 형태로든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서애 선생의 시(時)에 도가적(道家的)인 분위기가 풍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때는 퇴계를 만나 성리학 입문서인 ‘근사록’을 배우기 5-6년 전이었다.
한문(韓文)은 당나라의 명문장가인 한유(768-824)를 말하며, 원도(原道)란 한유가 지은 ‘도(道)의 본원’이라는 주요 논문을 말한다. 한유는 원도에서 ‘도(道: 仁義에 맞게 따라가는 것)’가 요임금→순임금→우임금→탕왕→문왕→무왕→주공→공자→맹자로 이어졌다는 ‘도통론(道統論)’을 주장하면서 맹자를 도통의 반열에 포함시킨 반면, 이러한 도의 정통에 노자‧장자‧순자는 포함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노장(老莊)과 불가(佛家)를 배척의 대상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한유는 “문장은 미사려구 만이 아닌 도(道)가 본바탕으로 배어 있어야 한다”는 ‘문도합일(文道合一)’을 추구했다.
서애 선생이 한유를 기억하고 있었음은 임진왜란 도중인 1595년(선조 28)의 선조실록 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 때 선생은 제도개혁을 통한 전란 극복과 국가 백년대계 건설을 위해 신상필벌의 확행, 은(銀)의 채굴과 유통, 인재의 발탁, 진관제 복귀, 지속적인 군사 훈련과 군량의 마련, 서리(胥吏,아전)들의 간계와 횡포 근절3) 등을 건의하였고, 이에 선조가 “행할 자는 누구인가, 훈련하는 일까지 비웃는다”고 냉소적 반응을 보이자, “한퇴지(韓退之, 한유)가 고문(古文)4)을 할 때 사람들이 처음에는 놀라고 중간에는 비웃고 배척하고 종당에는 흔연히 따랐으니, 대개 인정(人情)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5)라고 고례를 들며 설득했다.
장자 ‘추수편’의 경우 총 일곱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장자 중에서도 명문장으로 꼽힌다. ‘황하의 신 하백(河伯)과 북해의 신 약(若)의 대화’로 이루어진 추수편 1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한한 시공간 속에서 지극히 미미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사회적 차별의식을 절대화 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차별적인 태도를 버리고 만물 일체의 관점에서 자연성을 회복하고 자연의 질서에 따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장자는 마지막 편인 ‘물고기의 즐거움을 주제로 한 혜시(혜자,惠子)와의 대화’에서 인간과 인간의 소통뿐만 아니라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의 인간과 만물의 소통을 이야기 하였다.6)
위 홍가신의 글 중에서 서애 선생이 어릴 적에 해학(諧謔)을 좋아했다고 한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해학의 사전적인 정의는, “언어적 표현에 의해 웃음을 유발하게 하는 위트(wit)와는 구별된다. 또한 풍자와 조롱과는 달리 선의의 웃음을 유발하는 것으로 인간에 대한 동정과 이해, 긍정적 시선을 전제로 한다(문학비평용어사전)”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의의 웃음 유발’과 ‘인간에 대한 동정과 이해 및 긍정적 시선’은 서애 선생의 일생을 통해 나타난 따뜻한 인간애의 품성과 일치한다.
참고로 선생의 고향인 하회마을에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하회탈춤’이 있는데, 이 ‘하회탈춤’은 양반‧선비‧스님‧할미‧각시‧초랭이 등 다양한 계층과 부류를 등장시켜 인간 의 위선이나 속된 욕망을 해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청중을 저절로 웃게 하는 내용이다.
이 글을 쓴 홍가신(1541-1615,중종 36-광해군 7)은 본관이 남양이고 충청도 아산 출신이다. 홍가신의 문집인 ‘만전당집’에는 수록된 총 17편의 시 중에서 서애 선생을 생각하는 시가 무려 5편으로 최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홍가신이 1575년(선조 8)에 부여현감으로 내려가 백제의 충신 성충‧흥수‧계백을 기리는 의열사를 세워 사액을 받자, 부제학이던 서애선생은 ‘의열사기’를 지어 내려 보내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내 친구 홍후(洪候) 흥도(興道, 홍가신의 자)가 자기의 녹봉을 내어 놓고 창고 곡식을 절약한 것으로 노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역사가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서 두어 달 만에 준공하였다.---내 듣건데 흥도가 정사(政事)하는 것이 이미 자상하고 즐겁고 평이한 것으로 백성의 마음을 얻고 더욱 교화하여 백성을 깨우쳐 주는 도리에 마음을 두어 능히 그윽한 빛을 빛나게 나타내고, 얇은 것을 격동해 일으켜서 이로써 일방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였으니 그 일이 더욱 높일 만하다--- ”7)
홍가신은 서애 선생과의 이러한 우의를 되새기기 위해 선생 사후에 ‘약서 류이현행적’(略敍 柳而見行跡, 류이현의 행적을 대략 기록함)이라는 위의 글을 남기면서, 소년 시절에 이불을 같이 덮고 공부했던 추억을 회고하였으며,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억울하게 탄핵을 받고 낙향하여 초연히 임종을 맞이한 서애 선생이 때로 꿈에도 나타났다는 등 다음과 같이 깊이 애도하였다.
무술년(1598,선조 31) 간에 공(公,류성룡)이 성 밖에 나가 임금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홍주목사로 있었는데, 한 글을 보내어 물었더니 공이 대답하기를 “한 번 세상에 나오면 영욕과 득실은 면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만 사군자(士君子)가 평생에 자기 몸을 행하는 것이 다만 자기의 마음에 부끄럼이 없으면 가하다. 그 나머지 밖으로부터 노는 것은 나에게 가(加)와 손(損)이 될 것이 없다” 하였다. 내 매양 공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을 배우려 해도 얻지 못하고 경천(輕淺)하고 소략(疏略)한 병이 늙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하다. 오늘날 구원(九原,황천길)에 간 사람을 일으킬 수 없으니 평일 금옥(金玉) 같은 그의 얼굴을 쫓아 생각할 제, 때로 몽매(夢寐, 꿈) 사이에 나타나서 깨어나서도 오히려 난초 같은 향기가 애연함을 깨닫게 되매, 한갓 슬퍼하고 탄식할 뿐이로다.8)
한편 선생은 후일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년 시절 맹자와 춘추를 읽고 문장의 흐름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선생은 아이들에게 무엇 보다 4서의 숙독을 강조하였다.)
경신년(1560, 명종15) 겨울에 《맹자(孟子)》 1질을 가지고 관악산에 들어가서 두어 달 동안 20여 차례 읽고 나서야 겨우 첫머리부터 끝까지 욀 수가 있었다. 산에서 내려와 서울로 오는 동안 말 위에서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양혜왕장(梁惠王章)에서 진심장(盡心章)까지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정밀한 뜻을 깊이 알지 못했지만 군데군데 마음에 이해가 되는 곳이 있었다. 그 이듬해 하회에 와 있으면서 《춘추(春秋)》를 30여 번을 읽고선 이때부터 조금씩 문장의 흐름을 이해하게 되어 다행히 급제하였다.9)
2) 문사의 사전적 의미는 ‘글을 짓기 위한 생각’ 또는 ‘글 속에 들어 있는 사상’이다. 3) 남명 조식의 ‘우리나라는 서리 때문에 망한다’는 말을 인용 4) 한유가 대구(對句)와 음조(音調)를 중시한 화려한 형식의 변려체(騈儷體)를 배격하고 고문(古文), 즉 한대 이전의 자유스러운 형식을 표본으로 하는 의고체(擬古體)를 제창하는 등(출처: 중국인물사전. 한유) 문장과 사상을 개혁한 것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여기에서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실질적인 개혁을 뜻하기 위해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5) 선조실록 28년 1월 22일, 주역을 강하다. 일본과의 강화‧군사제도의 일‧도원수의 체직 등을 논하다. 6) 이 부분은 김갑수의 ‘장자’(2019, 글항아리) 288쪽의 해설을 약간 줄여서 인용하였다. 7) 만전집 6권, 의열사기 8) 만전집 5권, 약서 류서애이현행적 (略敍柳西厓而見行迹) 9) 서애선생문집 제12권, 서(書), 여러 아이들에게 보냄[寄諸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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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하늘이 내렸으니 훗날 반드시 큰일을 할 것이다’(퇴계 이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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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陶山)에 가서 퇴계 선생을 찾아뵙고, 수개월을 머물면서 근사록(近思錄) 등을 수업하였다. 이때부터 성리학에만 전념하면서 실천적인 것을 강구하여 반드시 성현으로 지표를 삼으니, 퇴계 선생이 크게 칭찬하였다. 얼마 후 선생은 금계(金溪)에 있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찾아갔다. 김학봉은 선생에게 말하였다. “우리들은 퇴계 선생을 모신 지 오래되었으나, 한 말씀도 칭찬받은 일이 없었는데 공은 선생을 한 번 뵈었는데도 선생이 바로 ‘이 사람은 하늘이 낸 바로, 훗날 반드시 큰일을 할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공은 어떻게 스승에게서 이러한 칭찬을 받게 되었소?”하였으며, 또한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서애(西厓)는 나의 스승이다.” 라고 말하였고, 선생도 전에, “학봉은 내가 따라갈 수 없다.” 라고 하였으니, 그분들의 교제는 서로를 높여 줌이 이와 같았다.
⇒ 서애 연보, 선생 21세, 1561년(명종 16)
---------------------------------------------------------------------- 21세의 청년 류성룡은 도산으로 퇴계선생을 찾아가 수개월 간 머물면서 근사록(성리학 입문서) 등을 배움으로써 비로소 사제관계가 맺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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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같은 아들이 있으면 걱정이 없겠다(백담 구봉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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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 구봉령은) 일찍이 “사람의 현우(賢愚)와 득실은 쉽게 분별할 수 없다. 반드시 험난함을 겪은 뒤에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늘 류서애(柳西厓 류성룡의 호)의 사람됨을 사랑하여, 이에 “이현(而見 류성룡의 자)과 언우(彦遇 김부필의 자)10)공 같은 아들이 있으면 걱정이 없겠다.”라고 하였다.
⇒ 백담집(구봉령 문집) 10권, 유어(遺語)
----------------------------------------------------------------------------- 백담 구봉령(1526-1586,중종 21-선조19)은 서애 선생 보다 16세 연장이다. 본관은 능성이고 고향은 안동이다. 대사헌과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대사간이던 동인 이발로부터 ‘심의겸의 친구’라는 지목11)을 받기도 했지만 당쟁이 심화되던 시기에 아끼는 서애 선생에게 보낸 답장에서 이이를 극력 변호하였다.12)
그리고 이에 앞서 1571년(선조 4) 서애 선생과 이이‧ 이발이 구봉령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일화가 퇴계집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미년(1571, 선조4) 7월에 이숙헌(李叔獻 이이)ㆍ류이현(柳而見 류성룡)ㆍ이경함(李景涵 이발)이 내게 와서 이야기를 했다. 숙헌(叔獻)이 경함(景涵)에게 말하기를, “내가 처음으로 퇴계 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했더니, 선생은 한참 잠자코 있다가 ‘마음가짐은 속이지 않는 것이 귀하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마땅히 일을 좋아하는 것을 경계하라.’라고 하셨습니다.”하였다. 내(구봉령)가 이 말을 듣고, “선생께서 사람을 가르치는 뜻이 이처럼 깊고 간절하니 이것이 어찌 숙헌과 경함만이 받들어 행할 일이겠습니까. 저 또한 힘써야겠습니다.”하고서 경함에게 청하여 두 장을 써서 한 장은 내 방벽에 붙이고, 한 장은 이현이 가지고 갔다. -구봉령(具鳳齡)-13)
10) 김부필(1516-1577,중종 11- 선조 10)은 광산 김씨로 안동 출신의 퇴계 문인이다. 호는 후조당이다.아버지는 대사헌 김연이다. 구봉령‧ 권호문‧김인후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행실로 신망이 높았다. 11) 선조실록 17년 8월 25일, 대사간 이발이 간원에서 심의겸의 죄를 논한 일로 사직을 청하다. 12) 백담집 제8권, 서(書), 류이현에게 답함〔答柳而見書〕 13) 퇴계집 언행록 1 유편(類編)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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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제일가는 경연 강관(미암 유희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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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서경(署經)을 거쳐 수찬 류성룡이 들어왔는데, 그 학문과 문장이 정밀하고 합당하였으며 사람 됨됨이도 아낄만하여 매우 기뻤다.
⇒ 미암집 제7권, 일기(日記), 1570년(선조 3) 5월 1일
유희춘이 임문(臨文)하여 아뢰기를,--- 지난번 류성룡이 강관이었을 때에 진설(陳說)이 정밀하고 절실하므로 강관 중에서 첫째라고 하였는데, 이제 대고(大故, 부친상)를 당하여 장차 3년을 보내야 하니 사림이 많이 아까와 합니다.
⇒ 선조실록 6년(1573) 8월 16일, 조강에 ‘서경’을 강하고 유희춘이 풀고 ‘강목’의 인출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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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재주와 식견이 있어 모두 찬미하였으나, 일심으로 봉공하지 못하고 때로 이해(利害)를 돌아보는 뜻이 있어 군자는 부족하게 여겼다.(율곡 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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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을 상주 목사로 삼았다. 류성룡이 모친이 늙어서 가까운 읍을 얻어 봉양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네가 나가면 내가 한 신하를 잃는다. 다만 모자의 정이 간절하니 듣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리고는 상주 목사를 시키니 선비들이 모두 그가 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류성룡은 재주와 식견이 있고 경연에서 계사(啓辭)하면 잘 설명하여 아룄으니, 사람들이 모두 찬미하였다. 다만 일심으로 봉공하지 못하고 때로는 이해를 돌아보는 뜻이 있으니, 군자는 부족하게 여겼다.
⇒ 대동야승, 석담일기(이이 저) 하권, 1580년(선조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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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망(衆望)있는 보배로운 신하 류성룡이 조정에 없어 당쟁이 격화(동강 김우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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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三司)에서 서로의 사이가 어그러질 만큼 논의가 격렬하였고 이이를 탄핵하는 글월 역시 준각(峻刻)하여 자못 듣는 이를 놀라게 하였으나, 당초에는 그릇되고 실정에 맞지 않는 일로 인하여 ‘주상을 업신여기고 권리를 남용했다.’는 죄목으로 지척했던 것인데 급기야 자처(自處)하는 말 가운데서 불복의 뜻을 보이자, 이번에는 또 ‘사랑을 굳히기 위하여 임금에게 강요하고 공론을 배척했다.’는 이름을 덧붙이고 심지어 나라를 그르친 소인으로까지 지목하면서 헐뜯고 배척하기에 모든 방법을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아아, 이 어찌 이것이 이의 본뜻이었을 것이며 이렇고서야 어떻게 인심을 승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원인은 근래 이이가 사류(士類)들과 자못 화협을 잃어 괴상한 또 다른 논의가 분연히 그 사이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지난날 경안 부령(慶安副令) 이요(李瑤)의 면대시의 말만 하더라도 그는 곧 류성룡(柳成龍) 등 4인을 가리켜 전권(專權)을 한다고 하여 물리쳐 멀리하도록 하려 하였다는데, 류성룡 등은 모두 청명(淸名)ㆍ아망(雅望)으로 사림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들로서 참으로 유악(帷幄)의 보배로운 신하들입니다. 그런데 한번 요의 말이 나오자 사류들은 안절부절 하고 류성룡 등은 모두 퇴축(退縮)하여 허물을 살피느라 감히 국론(國論)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이에 대한 사림들의 의혹은 더욱 깊어졌고 일 좋아하는 부조(浮躁)한 무리들은 이로 인해 함께 떠들고 일어나 비로소 공격할 뜻을 두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일 역시 어찌 사류들의 본심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시작은 한둘 일 좋아하는 부조한 무리들에 의하여 된 것인데 사류들이 모두 이이를 그르다고 여겼기 때문에 억제하지 못했던 것이며, 또 류성룡 등이 이미 가고 없어 대각(臺閣)에 물론을 진정시킬 만한 중망(重望)의 인물이 없기 때문에 저들 멋대로 배격(排擊)하여 여기까지 이른 것입니다.
⇒ 선조실록 16년(1583) 7월 19일, 대사성 김우옹이 대간의 이이 비판과 성혼의 상소를 논하면서 조정하는 상소를 올리다
---------------------------------------------------------------------- 이 상소는 1583년(선조 16) 7월에 동강 김우옹이 올린 것이다. 김우옹은 동인이지만 이이와도 친한 사람이었다.
같은 해 율곡 이이는 병조판서를 맡아 여진족의 침입인 ‘니탕개의 난’에 급히 대처하는 과정에서, 전마(戰馬)을 바친 사람에게는 북변 복무를 면제시켜주고 사후에 선조에게 보고한 일이 있었고, 또 선조의 부름으로 궁궐 안에 들어왔다가 현기증이 재발하여 내병조(內兵曹,병조의 분소)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이는 업무와 의전상의 실수였다. 선조는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병조판서 이이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던 시기여서 이러한 실수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고 보았지만, 동인 중심의 삼사가 간쟁권을 발동하여 “이이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교만하여 임금을 업신여겼다”며 공격하였으며,14) 이에 이이는 병조판서직을 사퇴하는 것으로 맞서 당쟁이 격화되었다. 그러자 김우옹은 상소를 올려 선생과 같은 중망 있는 사람이 조정에 없어 양측을 진정시킬 수가 없는 등 당쟁이 격화되었다고 상소한 것이다.
선생은 이에 앞서 종친인 경안령 이요가 4월 17일 선조를 면대하여 선생과 이발‧김효원‧김응남 등을 ‘동인의 괴수들’이라고 지목하면서, “저희들 멋대로 하는 일들이 많으니 재억(裁抑)을 가하기 바란다”고 견제한 일이 있자, 당쟁이 싫다며 낙향해버렸다. 선생은 계속 고향에 머물면서 함경도 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등 관직을 사양하다가 10월에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자 어머니를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는 자리여서 받아들였다. 같은 해 동인 일부가 간쟁권을 발동하여 이이를 공격함으로써 야기된 당쟁은 성혼‧박순‧정철 등 서인들의 가세로 더욱 격렬해졌으며, 결국 선조가 서인들의 편을 들어 대사간 송응개‧ 도승지 박근원‧ 홍문관 전한 허봉15) 등 이이 공격에 앞장 선 3명을 유배 보냄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후세에 이 사건을 놓고 ‘계미년에 세 사람을 유배 보내 쫓아냈다’는 뜻의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4) 일부 동인들의 이이 공격은, 그가 병조판서 보임 이후 선조에게 독대를 보장해 달라고 요구한데 대한 경계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선조와 이이의 ‘밀실 논의’가 동인들을 억누르고 서인들을 부축하는 ‘억동부서(抑東扶西)’의 기회가 될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이는 1년 전 이조판서가 되었을 때에도 선조에게 인사 실권(實權)을 요구하여 동인들을 긴장시킨 바 있다. 15) 3명 중 허봉은 동인의 좌장이자 이이로부터 악평을 받은 허엽의 아들이며 허균의 형이다. 그는 불과 9년 전인 1574년(선조7) 성절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갈 때 사행단에서 잠시 이탈하여 파주 율곡에 있는 이이를 찾아갈 정도로 이이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고, 이이 또한 찾아온 허봉을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이 때 이이는 자신을 찾아준 15세 연하의 후학 허봉을 상대로 시사에 대해 한탄하면서 왕에게 진헌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작성 중인 ‘성학집요’를 서슴없이 보여주고 기꺼이 필사를 허락하였으며, 허봉은 이이의 성학집요를 대단히 얻기 어려운 책이라고 평가하는 등 이이의 학문에 대해 감탄하고, 궁핍한 낙향 생활에 대해 연민의 정을 표명하는 등 대단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9년 뒤에는 병조판서 이이의 실수를 '권력의 독단과 교만'으로 규정하는 강력한 탄핵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다. 허봉은 서장관으로 명나라로 갈 때 꿈속에서 류성룡을 만났다고 기록했으며, 류성룡은 허봉의 명나라 방문기인 조천록의 지(識)를 써 주었다.(허봉의 문집인 하곡집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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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마음을 감복시키는 군자이자 당금의 대현(국왕 선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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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소를 보니 그 말이 궤탄(詭誕,거짓되고 망령스럽다)스럽고 황홀하여 헤아리기 어렵다. 대개 내가 말하는 현자(賢者)란 이이와 성혼이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을 공박하는 자들은 반드시 간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류성룡도 군자임이 틀림없는데, 나는 그를 오늘날의 대현(大賢)이라 하더라도 가하다고 여긴다. 그를 바라보고 함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감복하는 때가 많다. 어찌 그러한 학식과 기상을 가진 자가 큰 간인일 수가 있겠는가. 어느 담 큰 자가 그런 말을 하였는가.---”
⇒ 선조수정실록 18년 5월 1일, 의주 목사 서익이 정여립 등을 논평하여 상소하다
------------------------------------------------------------------------------- 선조는 의주목사 서익으로부터 받은 상소에, “과거 정여립이 이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류성룡을 큰 간인이라고 했었다”는 내용이 있자, 그러한 정여립의 주장이 터무니없음
을 반박하는 언급이다. 이 상소가 있은 당시는 이이가 사망한 지 1년 이상 지난 시점
으로서, 선조가 서인 중심의 정국 운영에서 벗어나 동인 중심으로 선회하던 시기였다.
의주목사 서익은 이이의 문도인데, 정여립이 이이 생전에는 그를 찬양하며 추종하
다가 사망 후에는 변심하여 동인으로 돌아서자 이와 같은 심사를 들춰 공박하기 위해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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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의 정치는 강직하고 명백(소재 노수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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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이르기를, “조신들은 마음을 합하여 서로 협조하고 공경해야 하는데 도리어 치고 받고 하였다. 신하에게 죄주는 것이 어찌 내가 바라는 바이겠는가.” 하고, 또 묻기를, “류성룡(柳成龍)은 어떻게 정치를 하는가?” 하니, (좌의정 노수신이) 대답하기를, “강직하고 명백하게 합니다.” 하다.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사람은 얻기 쉽지 않으니, 내가 도로 불러 오려 한다.”
⇒ 대동야승, 계갑일록16) 1584년(선조 17) 5월 24일
-------------------------------------------------------------------- 이 기사는 선조가 전년도에 경상감사로 내려 보낸 류성룡의 근무 태도를 좌의정 노수
신으로부터 확인하고, 다시 중앙 조정으로 불러올리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후
류성룡을 홍문관 부제학→예조판서에 연이어 제수하였다. 노수신은 이준경의 4촌 이
연경의 사위이다. 을사사화 때 억울하게 순천으로 유배되었던 전력이 있다. 회재 이언
적에게 영향도 받았으며 양명학에도 관심이 있었다. 영의정에 올랐다. 류성룡의 부친
인 입암 류중영의 비문을 썼다.
16) 계갑일록은 우성전이 쓴 일기체의 기록이다. 계미년(1583년,선조 16)과 갑진년(1584년, 선조 17)의 시사를 기록했다 하여 계갑일록이라고 이름하였다. 우성전(1542-1593, 중종 37-선조26)은 류성룡과 함께 퇴계에게 동문수학한 동갑내기 절친이다. 촉망 받은 동인이었으며 후일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릴 때 남인의 영수로 지목되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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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卿)과는 군신의 의리가 있다고 하지만 정분은 친구와 같다(국왕 선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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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 감사 류성룡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류성룡이 부름을 받고 와서 사은하고, 이어 사직하고 돌아가 부모 봉양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금 후에 예조 판서 겸 동지경연 홍문관 제학에 승진되었는데, 류성룡이 사양하니, 상(선조)이 수찰(手札,친필)로 유지를 내렸다. “옛날 임금은 신하를 대하면서 신하로 대우한 경우도 있고 벗으로 대우한 경우도 있고 스승으로 대우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의리가 후세에 전해오진 않았으나, 경은 10년 동안 경악(經幄, 경연)에 있으면서 완전한 덕을 갖추어 하자가 전연 없었으니, 임금과 신하의 의가 있다고는 하지만 정분은 친구와 같다. 또 학문으로 논하면 장구(章句)에나 얽매이는 고루한 선비가 아니고, 재주로 말하면 충분히 큰 일을 맡을 수가 있다. 경을 알아보는 이는 나만한 자가 없을 것이다.”
⇒ 선조수정실록 17년(1584) 9월 1일, ‘경상 감사 류성룡을 부제학으로 삼았다가 예조 판서로 승진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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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근심이 안면에 넘쳐 흐르니 정말 지성으로 국가를 위하는 사람(이여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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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漢陰) 이덕형의 수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공(公, 류성룡)은 매번 제독(이여송)에게 글을 보낼 적에 고금을 드나들며 의리를 인용하여 수천백 언(數千百言)은 붓을 잡으면 곧 완성하였다. 제독이 그 말을 들어 쓰지는 않았으나, 그의 재주와 식견에 깊이 탄복하였으며, 또한 ‘류모(柳某)는 근심하는 빛이 안면에 넘쳐흐르니 정말 지성으로 국가를 위하는 자이다.’ 하였다.” 총병 오유충(吳惟忠)과 유격 척금(戚金)도 사람에게 말하기를, “류풍원(柳豐原, 류성룡)은 조선의 어진 재상이다.”하였고, 참모 여응종(呂應鍾)의 《조선기(朝鮮記)》에도 선생의 충성심과 기개를 칭찬하였다.
⇒ 서애선생 연보 제1권 선생 52세, 1593년(선조 26) 4월
--------------------------------------------------------------------- 이 기사는 서애선생이 명군의 대일 화친 추진에 항거하는 듯으로 목숨을 걸고 황제의
기패에 참배하지 않아 수모를 겪은 사건이 있은 다음에 이여송을 비롯한 명나라 장수
들이 그의 충성심에 탄복하면서 말한 내용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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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에게 국정을 전임시키면 어려움을 물리치고 산하를 재조할 것(명나라 사신 사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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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 류성룡은 굳세고 정도(正道)를 잡아 모든 신하의 으뜸이 되고 있다는 말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으니, 왕은 참으로 모든 국정을 그에게 전임시키면 근 s 반드시 왕을 위하여 근심을 나누고 일을 맡아서 어려움을 물리치고 어지러움을 진정하여 사직을 안정시킬 것이며, 산하(山河)를 재조(再造)할 것입니다.
⇒ 선조실록 26년(1593) 윤11월 16일,‘흠사 일품 복색 행인사가 보낸 자문’
---------------------------------------------------------------------- 이 기사는 명나라의 특명사신 사헌(司憲)이 선조에게 보낸 공식 문서이다. 당시 사헌
은 선조가 무능하다는 본국의 판단에 따라 여차하면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등
왕을 갈아치우라는 명을 받고 왔으나, 1주일간 조선에 체류하면서 서애선생의 뛰어난
활약과 우국충정에 감복한 나머지 왕위 교체 문제는 없던 일로하고 돌아가면서 이와
같은 자문을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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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나라를 중흥시키는 신기한 공을 세우고도 함구로 일관(유천 한준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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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柳川) 한준겸(韓浚謙)17)의 수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보다 앞서 경략 송응창이 요동에 있으면서 주본을 올렸다. 그 내용은, 우리나라 임금이 덕망을 많이 잃어 국란(國亂)을 평정할 수 없는 군주이므로 속히 조치하여 세자에게 양위하기를 주청한 것이었다. 그로 인하여 행인 사헌(司憲)이 나오게 되었고, 우리의 입장은 매우 난처하였다. 공(公,류성룡)은 피나는 정성을 다하여 화인(華人)을 감동시켰으며, 난리 중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아 왕위도 안정되었고, 국가가 그 힘을 입어 중흥이 되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공이겠는가. 공이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소리 하나 내지 않으면서 국가의 기반을 태산같이 튼튼하게 조치하였다 할 것이다. 모든 일이 경과한 후에는 입을 막고 그 당시 일을 말하지 않았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신공을 거두는데도 고요히 처리하여 일이 없는 듯하였다는 말도 이보다 지나지 않은 것이다.”
⇒ 서애선생 연보 제1권 선생 52세, 1593년(선조 26) 11월
---------------------------------------------------------------------- 이 기사는 바로 위에 있는 명나라 사신 사헌의 평가 부분에서도 나타났듯이, 서애 선
생은 명나라에 의한 ‘분할역치(分割易置)를 막아 ‘재조산하(再造山河)’ 대공을 세웠음
에도 전혀 티를 내지 않는 선생의 겸손한 인품을 묘사한 글이다.
17) 한준겸(1557-1627, 명종 12-인조 5)은 임란 때 도체찰사 류성룡의 종사관 등을 지냈다. 당색은 남인이지만 후일 반정이 성공하여 인조의 장인 신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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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청렴 개결하고 정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으며, 나라를 걱정하고 사가(私家)를 걱정하지 않으니 그 마음이 슬픕니다(오리 이원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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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1599, 선조32) 2월에 공이 복명하니 상이 위로하기를, “혈성(血誠)으로 변무(辨誣)하느라 수고가 많았소.”하였다. 공(이원익)이 사례하고 상소하기를,“류성룡은 청렴 개결하고 정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으며 나라를 걱정하고 사가(私家)를 걱정하지 않으니 그 마음이 슬픕니다. 이 사람이 배척되면 그와 친하다 하여 배척되는 자도 있을 것이고, 의론을 달리한다 하여 배척되는 자도 있게 되어 사류(士類)가 순식간에 모두 배척될 것이니 국가의 복이 아닌 듯싶습니다.”하고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 기언 제38권 원집, 동서기언, 오리(梧里) 이 상국(李相國, 이원익) 유사(遺事)
-------------------------------------------------------------------- 이 기사는 서애선생이 1598년에 발생한 ‘정응태의 조선무고사건’의 변무 진주사를 자
청하지 않아, 오리 이원익이 대신하여 명나라를 다녀온 직후에 사행 결과를 복명하는
자리에서 삭탈관직 당한 서애선생의 억울함을 호소한 내용이다.
서애선생과 오리 이
원익 등 남인들의 정치관은 타 정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공도정치(公道政治)를
지향하는 것이었고 공인의식(公人意識) 또한 더 높았다. 이 상소에서는 오리 이원익의
그러한 인식의 일단이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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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의 훌륭한 점은 어느 한 가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백사 이항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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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5년(1602년)조정에서 선생(류성룡)을 염근리(청백리)로 선정했다. 이때 이공 항복이 이 일을 주관하였는데, 선생을 으뜸으로 천거하며 말하기를 “이분의 훌륭한 덕이야 말로 일절(一節)로서 이름지을 수 없다(此老不可以一善名,차로불가이일선명). 그러나 이 선발에 기록한 것은 미오(郿塢)18)라는 무고를 씻으려 함이다”고 하였다.
⇒ 서애 연보 선생 61세(1602,선조 35), 행장(정경세 찬술), 기언 제38권, 서애(西厓) 유사(遺事) 등
18) 미오는 후한의 간신 동탁의 부정축재물 비축 장소를 가리킨다. 1598년(선조 31) 문홍도가 서애선생을 탄핵할 때 터무니없게도 부정축재의 대명사인 미오를 들먹이며 헐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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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졸기(선조실록 및 선조수정실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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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사신은 논한다. 류성룡은 경상도 안동 풍산현 사람이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하였다. 어린 나이에 퇴계(退溪) 선생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예로써 자신을 단속하니 보는 사람들이 그릇으로 여겼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가 날로 드러났으나 아침저녁 여가에 또 학문에 힘써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기대거나 다리를 뻗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응접하는 즈음에는 고요한 듯하였으나 문장이 정숙(精熟)하여 맛이 있었다. 여러 책을 박람(博覽)하여 외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의리를 논설하는 데는 뭇 서적에 밝아 수미(首尾)가 정밀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경사(京師,북경)에 갔을 때 중국의 선비들이 모여 들었으나 힐난하지 못하고서는 서애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명예와 지위가 함께 드러나고 총애가 융숭하였다.재상의 자리에 올라서는 국가의 안위가 그에 의지하였는데, 정인홍과 의논이 맞지 않아서, 인홍이 매양 공손홍(公孫弘)이라 배척하였고, 성룡 역시 인홍의 속이 좁고 편벽됨을 미워하니, 사론(士論)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서로 공격하는 것이 물과 불 같았다. 성룡은 조목ㆍ김성일과 함께 퇴계의 문하에서 배웠다. 성일은 강의(剛毅), 독실하여 풍도가 엄숙하고 단정하였으며 너무 곧아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으나 대절(大節)이 드높아 사람들의 이의가 없었는데 계사년 나라 일에 진력하다가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조목은 종신토록 은거하면서 학문에 독실하고 자수(自修)하였으나, 나라에 어려운 일이 많게 되자 강개해 마지않았는데 지난해 죽었다. 조목은 일찍이 성일을 낫게 생각하고 성룡을 못하게 여겼는데, 만년에는 성룡이 하는 일에 매우 분개하여 절교하는 편지를 쓰기까지 하였다. 퇴계의 문하에서는 이 세 사람을 영수로 삼는다. 류성룡은 조정에 선 지 30여 년 동안 재상으로 있은 것이 10여 년이었는데, 상의 권우(眷遇)가 조금도 쇠하지 않아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들었다. 경악에서 선한 말을 올리고 임금의 잘못을 막을 적엔 겸손하고 뜻이 극진하니 이 때문에 상이 더욱 중히 여겨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류모(柳某)의 학식과 기상을 보면 모르는 사이에 심복(心服)할 때가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규모(規模)가 조금 좁고 마음이 굳세지 못하여 이해가 눈앞에 닥치면 흔들림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의 신임을 얻은 것이 오래였었지만 직간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고 정사를 비록 전단(專斷)하였으나 나빠진 풍습을 구하지 못하였다. 기축년의 변에 권간(權姦)이 화(禍)를 요행으로 여겨 역옥(逆獄)으로 함정을 만들어 무고한 사람을 얽어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일망타진하여 산림(山林)의 착한 사람들이 잇따라 죽었는데도 일찍이 한마디 말을 하거나 한 사람도 구제하지 않고 상소하여 자신을 변명하면서 구차하게 몸과 지위를 보전하기까지 하였다. 임진년과 정유년 사이에는 군신이 들판에서 자고 백성들이 고생을 하였으며 두 능(陵)이 욕을 당하고 종사(宗社)가 불에 탔으니 하늘까지 닿는 원수는 영원토록 반드시 갚아야 하는데도 계획이 굳세지 못하고 국시가 정해지지 않아서 화의(和議)를 극력 주장하며 통신(通信)하여 적에게 잘 보이기를 구하여서 원수를 잊고 부끄러움을 참게 한 죄가 천고에 한을 끼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의사(義士)들이 분개해 하고 언자(言者)들이 말을 하였다. 부제학 김우옹이 신구(伸救)하는 상소 가운데 ‘성룡은 역시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마는 재보(宰輔)의 기국(器局)이 부족하고 대신의 풍력(風力)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정확한 논의이다. 무술년 겨울에 변무하는 일을 어렵게 여겨 사피함으로써 파직되어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그후에 직첩(職牒)을 돌려주었고, 상이 그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는 의관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 선조실록 40년(1607) 5월 13일 ‘전 의정부 영의정 풍원 부원군 류성룡의 졸기’
② 성룡은 안동 출신으로 호는 서애이며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일찍부터 중망이 있었다. 병인년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경연에 출입한 지 25년 만에 드디어 상신(相臣)이 되었으며, 계사년에 수상으로서 홀로 경외(京外)의 기무(機務)를 담당하였다.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咨文)과 게첩(揭帖)이 주야로 폭주하고 제도(諸道)의 주독(奏牘)이 이곳저곳에서 모여 들었는데도 성룡이 좌우로 수응(酬應)함에 그 민첩하고 빠르기가 흐르는 물과 같았다. 당시 신흠(申欽)이 비국(備局)의 낭관(郞官)으로 있었는데, 문득 신흠으로 하여금 붓을 잡고 부르는 대로 쓰게 하였는데, 문장이 오래도록 다듬은 것과 같아 일찍이 점철(點綴)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신흠이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와 같은 재주는 쉽게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량(局量)이 협소하고 지론이 넓지 못하여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한 나머지 조금이라도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면 조정에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이 득실을 거론하면 또한 감히 대항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하여 대신다운 풍절(風節)이 없었다. 일찍이 임진년의 일을 추기(追記)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懲毖錄)》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고 하여 이를 기롱하였다. 이산해가 그 아들 이경전과 함께 오래도록 폐척(廢斥)되어 있으면서 성룡을 원망하여 제거하려고 꾀하였다. 그 결과 무술년에 주화(主和)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변무(辨誣)의 사행(使行)을 피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떠나게 되었는데, 향리에 있은 지 10년 만에 죽으니 나이가 66세였다. 성룡은 임진난이 일어난 뒤 건의하여 처음으로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는데,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모방하여 포(砲)ㆍ사(射)ㆍ살(殺)의 삼수(三手)를 뽑아 군용을 갖추었고 외방의 산성을 수선(修繕)하였으며 진관법(鎭管法)을 손질하여 비어책(備禦策)으로 삼았다. 그러나 성룡이 자리에서 떠나자 모두 폐지되어 실행되지 않았는데, 유독 훈련도감만은 존속되어 오늘에 이르도록 그 덕을 보고 있다.
⇒ 선조수정실록 40년 5월 1일 ‘풍원 부원군 류성룡의 졸기’
---------------------------------------------------------------------- 서애선생은 1607년(선조40) 5월 6일 돌아가셨다. 선생의 졸기는 선생을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당파의 치세에서 작성된 것으로서, 졸기 ①은 광해군 때인 북인 치하에서
쓰여 졌고, 졸기 ②는 인조반정 이후 서인 치하에서 쓰여 졌기 때문에 부정적이거나
왜곡된 부분이 많다.
이에 따라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선조실록의 졸기(①)가 잘못되었음을 밝히기 위해 별도
의 기사에서 주장하기를, “실록을 편수하는 자가 서애선생을 비방하고 배척하면서 김
우옹의 말로 증거를 삼기까지 하였지만 김우옹은 원래 류성룡을 허여하여 교의가 매
우 긴밀했으므로 그 말을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류성룡의 관작을 회복하여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으로 삼았다. 성룡은 나라 걱정을 집안일
처럼 하여 알고서는 시행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임진년의 난리를 당해서 시행한 바가 많았는
데, 《실록》을 편수하는 자가 비방하고 배척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김우옹(金宇顒)의 말로 증
거를 삼기까지 하였다. 우옹은 본래 성룡을 허여해서 교의(交義)가 매우 긴밀했었으니, 그 말
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19)
선조실록의 서애선생 졸기에서 인용한 김우옹의 말이라는 것은 “재보의 기국이 부족
하고 대신의 풍력이 없다”는 것으로서, 이 말은 동강집 5권 ‘영의정류성룡신구소(무술
년 11월 한성좌윤시)’에 들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20) 그러나 이 부분은 1598년(선
조 31) 11월에 서애선생이 북인들의 탄핵으로 위기에 처하자 그를 구원하기 위해 올
린 상소의 일부분으로서, 김우옹이 선조의 불편한 심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짐짓
서애선생의 단점이 있는 것처럼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소의 겸양기법은
군주에 대한 예의이자 고차원의 심리전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신하의 지위에 있는
사람을 포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경우를 문자 그대로만 곧이곧대로 해
석하거나 인용하는 것은 도리어 사실을 왜곡하는 오류에 빠지게 되므로, 류성룡의 풍
원부원군 관작을 회복하는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바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또한, 현대에 접어들어 제3대 국사편찬위원장인 최영희 선생은 1977년 ‘인간 류성룡’
이라는 논고를 통해, 졸기 ①과 ②의 모순점과 부당함을 역설하면서, 졸기가 아닌 같
은 날 쓰여 진 사관의 논평이야 말로 서애 선생에 대한 진실한 평이며, ‘이 평으로
인해 서애선생이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으뜸가는 재상이었음이 증명된다’고 바로잡았
다. 최영희 위원장의 논고는 아래와 같다.
선조실록은 광해군시대에 북인이 주가 되어 편찬한 것으로서 임진왜란 이전의 기사는 간략하
고 그 후의 기사는 조잡하여 역대 실록 중 가장 나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파관계로 무책
(誣策)을 가한 것이 적지 않게 있는 것으로 서인과 그리고 남인 류성룡에 대해서는 없는 사
실을 꾸며서 비방하였다. 인조반정 후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그 수정을 건의하여 효종대에
선조수정실록이 완성되었으나, 이 또한 그 범주를 넘어선 것은 못되었다(신석호 박사의 고증).
위의 두 기록은 거의 같은 내용인데, 이 내용을 세밀히 분석하면, 앞뒤가 모순되는 것을 알
수 있다.
(1) 임진왜란 중에 ‘주화오국(主和誤國)이라는 것은 사실을 곡해한 것이다. (2)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하였다. 학문에 힘써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기대거나 다리를 뻗는 일이 없었다’는 등 도학자로 찬미하면서도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했다’고 하였다. (3)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는 모여든 중국의 선비들로부터 ‘서애 선생’이라는 칭호를 받는 등 당시에 국제적으로도 으뜸가는 인물이며, 임진왜란 때에는 ‘서애가 좌우로 수응함에 그 민첩하고 빠르기가 흐르는 물과 같았다’고 하면서도 ‘대신다운 풍절이 없었다’고 한 것은 모순이다. (4) 특히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훈련도감을 새로 설치하고 산성을 수축하였으며, 진관법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서애선생이 떠난 후로는 모두 폐하고 오로지 훈련도감만 남았다고 하여 그 국방책을 찬양하면서 그 공을 훼폐(毁廢)함은 자가당착이 된다.
그런데 선조실록이 서애선생이 졸한 뒤의 한성부민의 회곡(會哭)에 대한 사관의 평은 올바른 서애 선생에 대한 평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도성 각전(各廛,가게‧ 상가)의 백성이 모두 묵사동에 와서 회곡하였는데, 그 수가 1,000여명에 이르렀고 묵사동은 류성룡의 고가유기(故家遺基)가 있었다. 각 아문의 늙은 아전 30여명이 또 회곡하였고, 시민과 서리 등이 본가가 청빈하여 장사를 지내기 어렵다 하여 포(布)를 모아 부조를 하였다. 도성 백성이 회곡한 일은 오로지 이이‧ 유몽학 때만 있었는데, 이상가(李喪家)는 서울에 있었고 유몽학은 장령으로 있으면서 시정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베풀어서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 사람(서애 선생)이 조정에서 이미 떠났고 상가가 1,000리 밖에 있는데, 만성(滿城)의 백성들이 빈 집에서 회곡(會哭)함은 어찌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민생이 날로 궁핍해지는데 뒤를 이은 재상들 모두 전인(前人)만 같지 못하므로 추모하는 것이 이에 이른 것이냐?’--- 이 평으로서 서애 선생은 조선왕조를 통하여 가장 으뜸가는 재상이었음은 증명된다. (이 사관의 평가는 바로 아래 기사에 있다.)
19) 선조수정실록 36년(1603) 10월 1일 류성룡의 관작을 회복하여 풍원 부원군으로 삼다. 20) 夫成龍爲人。大槪非經世之才。無大臣風力。乏宰輔局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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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의 죽음으로 3일간 조시를 정지하다(선조실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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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동안 조시(朝市)를 정지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도성(都城) 각전(各廛)의 백성들이 빠짐없이 묵사동(墨寺洞)에 모여 조곡(弔哭)하였는데 그 숫자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묵사동에는 류성룡의 고가(故家)의 유기(遺基)가 남아 있었다. 각 아문(衙門)의 늙은 아전 30여명도 와서 곡하였다. 시민과 서리(書吏) 등이 본가가 청빈하여 치상(治喪)을 하지 못할 것이라 하여 포(布)를 모아 부의(賻儀)하였다. 성안 백성들이 곡한 일은 오직 이이와 유몽학이 죽었을 때에만 있었는데, 이이의 상은 서울에서 있었고, 유몽학은 장령(掌令)으로 있었을 때 시방(市坊)의 적폐를 개혁하기를 아뢰어 백성들에게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사람이 조정에서 발자취가 끊어졌고 상(喪)이 천리 밖에 있었는데도 온 성안 사람들이 빈 집에서 회곡하였으니, 어찌 시사가 날로 잘못되어가고 민생이 날로 피폐해지는데도 이어 수상(首相)이 된 자들이 모두 전 사람만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추감(追感)하기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의 백성들 역시 불쌍하다.
⇒ 선조실록 40년(1607) 5월 13일 ‘3일간 조시를 정지하다’
---------------------------------------------------------------------- 이 기사는 바로 앞에서 밝혔듯이 당파의 영향을 받은 공식적인 졸기와 달리 사관의
진실하고 정직한 논평이라고 할 수 있다. 서애 연보에 의하면 상인들이 제도에 따라
3일 동안만 철시한 것이 아니라 자진하여 하루 더 철시함으로써 보다 깊은 조의를 표
명하였으며, 길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우리들이 이 어진 정승을 잃은 것은 어린아이
가 어머니를 잃은 것 같다”고 슬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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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의 죽음은 나라의 불행(한강 정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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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애통합니다. 생각하면, 지나간 정유년(1597, 선조30) 여름에 공과 서울에서 작별을 나누던 그 당시 공은 느긋하게 가슴속의 생각을 남김없이 드러냈는데 하나같이 모두 나라를 걱정하고 시사를 슬퍼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이후 덧없이 흘러간 세월이 11년이나 되었습니다. 공은 도성에 계실 적에도 오히려 나에게 안부를 물어왔으나 공이 남쪽 고향으로 오신 뒤로는 소식이 감감하였고, 중간에 겨우 한 차례 편지를 띄워 그리는 심정을 토로했을 뿐 멀리 떨어져 있어 서로 만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이 고장에 부임하고 보니 공의 병세가 이미 위독해진 때였습니다. 공의 집을 찾아가 하룻밤을 묵으며 위문하기는 했으나 직접 얼굴을 보면서 손을 잡고 작별을 나누지는 못했는데, 공이 써서 나에게 넘겨준 몇 줄의 쪽지는 사연이 간곡하여 읽고 또 읽으며 감탄하면서 뭉클하게 일어나는 우정을 스스로 가눌 수 없었습니다. 그 뒤 두세 달 사이에 공의 심각한 병세를 걱정하지 않은 적이 없으면서도 한편 신명이 도와서 무사할 것이라고 축원해 마지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라의 불행이 갑자기 여기에 이를 줄을 알았겠습니까.
40년 동안 사귀어 온 관계가 이제 끝났습니다. 단아하고 정중한 의표와 단호하고 조용한 마음가짐, 정밀하고 용의주도한 식견과 깨끗하고 아름다운 행실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공께서 다시 한 번 일어나 가슴에 쌓인 경륜을 남김없이 다 펴서 우리 백성이 그 혜택을 입게 했으면 하고 바란 것은 사실 조야 사람들의 다 같은 마음이었는데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니, 저 푸른 하늘을 믿을 수 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라의 운수가 약해진 데 따른 슬픔이 더 지극하니 어찌 내 사적인 관계로 인한 슬픔만 있겠습니까.---
아, 공의 순결한 충성과 지극한 효성, 성대한 덕과 두터운 의리는 많은 사람의 이목에 깊이 젖어 있으며, 역사서에 그 내용이 기록되고 후학들이 모범으로 삼고 있으니, 어찌 굳이 선양하고 칭찬을 한 뒤에야 그런 줄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 한강집 제12권, 제문(祭文), 류서애 성룡 에 대한 제문
---------------------------------------------------------------------- 한강 정구(1543-1620, 중종 38-광해군 12)는 서애 선생 보다 한 살 아래이다. 아버지 정사중은 김굉필의 외증손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호성공신 1등인 정곤수는 그의 형이다. 5세 때에 이미 신동으로 불렸으며,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을 스승으로 삼았다. 1603년 남명집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인홍이 이황과 이언적을 배척하자 그와 절교하였다. 성리학과 예학에 밝은 영남학파의 뛰어난 학자이다. 서애선생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안동대도호부 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문장력이 돋보이는 이 제문은 대외에 비쳐졌던 서애 선생의 생전 이미지와 서거에 대한 애통함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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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도량이 작고 식견이 얕았으며 남의 비위 맞추기를 일삼고 파당을 심는 등 정승으로서 칭찬할 만한 업적이 아무 것도 없었다.(광해군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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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과 육조가 빈청에 모여, 선조묘에 배향할 명신을 의논 결정하여 이준경과 이황을 제1로 삼고 노수신과 류성룡을 제2로 삼아 의논을 드리니) 전교하기를, “지금 배향에 관한 장계를 보건대 노수신과 류성룡은 선조(先朝) 때 시종(始終)을 보전하지 못했던 사람이므로 묘정(廟庭)에 배향하는 것은 미안할 듯하다. 다른 상신(相臣)들도 적지 않은데 하필 그들로 하는가. 부득이하다면 이준경과 이황만을 배향하는 것이 가하다.”하였다. 대신들이 모두 가하다고 하자 그 의논을 따랐다.
노수신의 만절(晩節)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사람이 많으며, 류성룡의 문학이 단아(端雅)한 면은 있으나 도량이 작고 식견이 얕았다. 그는 10년 간 정승으로 지내면서 오직 남의 비위 맞추기를 일삼고 사사로움에 이끌려 파당을 심고 오로지 자기와 뜻이 같으면 좋아하고 다르면 싫어하였으니 정승으로서의 칭찬할 만한 업적이 아무 것도 없었으며 또 능히 시종(始終)을 보전하지 못했다.---
⇒ 광해군일기 년 3월 7일 이준경과 이황을 선조묘의 배향 공신으로 삼다
------------------------------------------------ 노수신은 정여립이 경연에서 오만한 태도를 보이면서 임금의 얼굴을 자주 올려다보는 등 처신에 불길한 점이 있다고 보면서도 좌의정 때 이발의 유도에 따라 정여립21)을 추천한 일이 있어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파직22) 되었다. 이에 정탁은 임란 도중 선조에게 당초에 정여립을 추천한 사람은 이이와 정철이라며 노수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애 선생 또한 임란 종전을 앞두고 삭탈관직 된 전력이 있어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지 못했다. 북인들은 선생을 ‘주화오국’으로 몰아 실각시킴으로써 집권할 수 있었던 세력이다. 따라서 북인들은 서인들 보다 선생을 더욱 미워했으며, 이로 인해 선생에 대한 평가 또한 아주 나쁘다.
21) 선조수정실록 17년 11월 1일 ‘정부에 하교하여 어진 인재를 추천케 하다’ 22) 선조실록 23년 3월 18일, 역적을 추천했던 노수신을 조정 공론에 의거하여 처치하라는 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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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류성룡과 이항복 같은 신하가 있었기 때문(미수 허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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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서쪽으로 파천하였을 때 서애공(西厓公 류성룡)이 이미 국가 존망의 중책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고, 공(이항복)은 공대로 상의 내부(內附,요동 망명)에 따라갈 것을 자청하였으니, 이 모두가 충신의 의리에서 나온 것이다. 임진왜란 때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이와 같은 신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 기언(미수 허목의 문집) 제10권 원집 중편, 인물, 백사 이상국(이항복)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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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한 한 건은 바로 나라를 중흥시킨 큰 기틀(교산 허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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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선왕(先王,선조)의 정치는 밝았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에 보좌했던 신하들이야 많기도 했지만 애호하며 서로 믿었던 사람은 이이였으며, 전권(專權)을 맡기고 일하도록 책임 준 사람은 류성룡이었다. 두 분 신하는 역시 유자(儒者)이자 재능 있는 신하였다고 말할 만하였다. 그들에게 임무를 맡기고 일의 성취를 독책하던 뜻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끝내 그들의 포부를 펴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재능이 미치지 못함이 아니었고 방해하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류성룡은 어지럽기 짝이 없던 임진왜란 때를 당해서 그의 정력과 지혜를 다했으나, 더러는 건져냈고 더러는 막혔던 게 그 당시 형편의 편리함과 편리하지 못함이 있어서였다. 그가 이순신을 등용한 한 건(件)은 바로 나라를 중흥시킨 큰 기틀이었다. 그런데 류성룡을 공격하던 사람들이 이순신까지도 싸잡아 죄주었으니, 그 해가 나라에 미침이 그 이상 더 심할 수 없었다.
⇒ 성소부부고(허균의 문집) 제11권 문부(文部) 8 정론(政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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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동인의 좌장 허엽의 아들이며, 허봉의 동생이다. 그의 문집에 의하면 서애 선
생과 같은 동네(건천동 또는 묵사동)에서 살았으며 선생에게 문장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서애선생이 탄핵을 받아 물러나자 1600년(선조 33)동갑내기 어릴 적 친구인
임현에게 편지를 보내, 그가 어진 정승인 서애 선생을 헐뜯은 대가로 북인들로부터
벼슬을 받은데 대한 분노를 다음과 같이 표명하기도 했다.
“어떤 이에게 들으니 자네가 서애를 헐뜯고 설서(說書,정7품 세자시강원의 관원) 벼슬을 얻었다고 하므로, 나는 그 말을 듣고서 무척 분노하였네. 서애는 어진 정승이니 헐뜯어서는 안 되네. 소인을 헐뜯고서 벼슬을 얻는다 해도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더구나 서애 정승을 헐뜯으면 되겠는가. 바라건대, 형은 차분하고 너그럽게 마음을 가질 것이며, 조급하게 행동하지 마시게. 앞길이 만 리라 하더라도 또한 타고난 운명이 있는 법이며, 괴상한 행동으로 요행하게 얻을 수 없는 것은 공명(功名)인 것이네. 속담에 ‘바삐 먹으면 목에 걸린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비록 비속하지만 큰 의미를 깨우치게 하네”23)
23) 성소부부고 제21권, 문부 18 척독 하(尺牘下), 임자승(林子昇,임현)에게 보냄, 경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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